바닥까지 끌어내리고 벌거벗겨 버리는 작품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네 편 정도 보았다. 시, 박하사탕, 버닝, 오아시스.
이창동 감독의 작품은 사람을 몰아친다. 끝까지 밀어 떨어져 버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떨어졌을 때 그곳에 세상의 바닥과 내가 있다.
홍종두(설경구)는 뺑소니로 2년 반 교도소 생활을 마치고 나온다. 그의 인격은 평범?하지 않다. 사회에서 한 겨울에 반팔을 입고 옆에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뭔가 교제를 나누길 원하는 사람처럼 서성이는 사람.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세상이 이런 사람은 감당하지 않는다. 사회는 철저히 너와 나가 구분되어 있으며, 나의 그룹과 다른 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가 우리 주변에 거미줄처럼 쳐있다. 그것을 허물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 혹은 무례한 사람, 꿍꿍이가 있는 사람으로 오해받기에 적합하다. 그렇지만 그는 영화 초반부터 그런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런 모습은 이미 그가 '일반사람'이라는 알 수 없는 미묘한 정의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말해준다. 초반부 버스정류장에서 담배를 빌리는 그의 모습을 쳐다보는 옆에 여자의 모습은 세상의 시선을 대신한다. 여기서 나오는 모든 시선은 우리의 시선이요, 나의 시선이다. 그에게 세상의 시선은 차갑고 냉랭하다. 담배와 불을 빌린 사내에게 다시 말을 걸어 보지만 그는 '모른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피한다. 만나면 피하고 싶은 사람 홍종두다.
그가 찾던 가족을 만난 곳은 경찰서였다. 가족도 버린 사람, 세상이 버린 사람, 하이데거가 말한 "피투성"(被投性) - 던져짐(투), 당한(피) - 된 존재,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에 적합한 인물이 홍종두이다.
"교도소에서 오늘 나왔으면 바로 집에 가서 오랜만에 가족도 만나고 그래야지 이놈아"
경찰의 말이다. 그가 나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가족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아니 그전에 버스정류장에서 그는 어머니에게 선물할 옷을 샀었다. 그는 처음부터 오해 받는 사람이기도 했다. 무전취식이 죄가 된다는 걸 몰랐냐는 경찰, 돈이 없으면 먹지를 말아야 한다는 경찰의 말은 맞는 말이지만 교도소를 나와서 가족을 잃어버렸던 그, 그리고 생리적 현상으로 배가 고팠던 그, 먹지말라던 경찰의 말은 어떻게 해석되어져야 할까..
"너도 이제 어른이 되야지? 응?"
그의 형의 말이다. 그리고 어른이 된다는 것 중에 "자기 행동의 책임도 지고"라고 말한다. 불쌍한 홍종두. 홍종두는 형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그의 교도소 2년 반의 생활은 그의 형의 뺑소니를 자신이 대신 받은 결과다 그는 앞길이 열려 있다고 생각한 형을 위해 교도소에 들어갔다. 그러나 교도소를 나와보니 사업의 실패로 상황이 더 좋지 않아진 형.. 누가 미안해야 할까..
한공주(문소리)를 처음 만나게 되는 장면. 그녀의 오빠 부부는 그를 버려두고 떠난다. 장애인용 아파트에 한공주의 명의를 빌려 입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공주는 허름한 곳에 남겨진다. 이 영화에서 두 주인공의 주변인들은 대게 이렇다. 자신들이 피해자인 입장과 봉사자의 입장을 취하려 하지만 거기에는 모순이 있다.
한공주를 처음 보고 예쁘다고 생각한 홍종두는 그녀의 집에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서 그녀의 몸을 더듬고 바지를 벗으려 한다. 그러다 한공주는 기절한다. 그리고 홍종두는 겁을 먹고 그녀를 깨우기 위해 애를 쓴다. 순간적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홍종두는 그녀를 겁탈할 뻔했지만 기절한 그녀를 겁탈하진 않는다.
순수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성범죄는 변호되기 어렵다. 그치만 이창동 감독은 이 장면을 넣었다. 우리는 오아시스를 보며 차별과 소수자들의 비애를 보게 되고 그들을 위해 말하려 할 때 이런 장면은 장애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성범죄를 결코 용서치 않는다. 여성들의 분노는 더하다. 그치만 오아시스가 우리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지점은 바로 이런 곳이다. 인간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떤 이를 굳이 변호하려고 하지도 더 깎아 내리지도 않고 그저 바닥의 실상을 보여주고 우리의 멱살을 잡고 그 바닥을 보게 한다.
중증뇌성마비장애인 한공주 그녀는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섹스를 들켜도 부끄러움을 줄 수 없는 존재이다. 옆집여자와 택시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섹스를 하며 한공주의 시선을 알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즐긴다. 홍종두가 어머니의 생신에 한공주를 데려가서 같이 사진을 찍으려 할 때도 그의 형은 한공주를 불쾌한 물건을 옆으로 치우듯 한다. 세상의 부적응자 홍종두, 세상의 소외자 한공주 그들의 사랑은 삐걱대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 그들의 존재는 다수가 아니며 소수이고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기에 그들과 다른 세상에 사는 이들은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왓챠의 어느 평론처럼 그들의 순수한 사랑은 그들과 상관 없는 이들 때문에 버겁다. 또는 그들이 희생하는 대상들에 의해 버겁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버겁기도 하다. 그들은 세상에서 바라보는 대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다수의 생각에서 벗어날 때 그들의 행위(사랑)는 다수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것이 된다.
누가 봐도 그들의 관계는 이상한 관계이지만 그들이 사랑을 나눌 때 영화는 문소리가 다수에 속한, 정상인이라 불리우는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그들의 사랑을 정상으로 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는 우리를 위한 감독의 배려다. 그들의 사랑도 이렇게 정상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