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은희가 알게 해 준 보편
그저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보게 된 영화 벌새. 이 영화가 주는 여운은 깊다.
당시 94년을 살았던 중학교 2학년 은희의 삶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보편으로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했다. 나는 은희의 나이 때에 학교 축구부에서 축구선수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시작한 축구를 20대 초반까지 하게 되었는데 축구를 좋아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서 여러 구타와 폭력 그리고 혹독한 경쟁체계에 환멸이 생겨 축구를 하기 싫을 때는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평범과 보편이라는 단어는 참 희미하고 어려운 단어라는 걸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알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이사를 많이 다닌 편이었다. 아버지가 사립학교 교사로 있으시면서 발령이 나시면 이사를 해야 했다. 그러면서 나름 여러 동네에서 살았던 기억이 있는데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주변 이웃의 싸우는 소리는 흔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 집의 부모님들도 싸우는 경우들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커서 지금은 그런 소리를 이웃에서 잘 듣지 않는 것 같은데 이건 기분 탓일까? 아니면 실제로 오늘날 부부들은 예전만큼 싸우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싸울 필요도 없이 이혼을 선택하는 걸까? 이혼율이 높아지는 건 어쩌면 그런 감정과 어려운 싸움을 포기하는 데서 오는 결과인지도 모르겠다는 뇌피셜을 펼쳐본다. 아무튼 어린 시절 옆집에서도 항상 고함치는 소리와 물건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던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영화 벌새의 은희의 집도 이런 싸움의 현장이 될 때가 많다. 부부가 싸우는 소리, 자녀가 혼나는 소리.. 보편의 소리들이었다.
그리고 은희의 삶은 중학교 2학년이라는 어리다면 어린 나이지만 그녀의 삶은 여러 갈등과 고민, 사건과 사고들로 이루어진 삶이다. 어리다고 그들의 삶을 쉽게 재단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의 어린 시절만을 생각해도 여러 감정적인 고민들과 어려움들로 결국 20대가 되면서 얻은 것은 공황장애였다. 어린 감성은 친구의 배신과 연인의 배신, 그리고 죽음의 공포 같은 것들을 쉽게 이겨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처음 겪어보는 일들로 더 깊은 내상을 입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과거로 갈수록 인권 의식과 교육 환경은 낙후했었기에 어린 세대가 겪는 고통은 참혹하기만 했으리라. 더 오랜 인류의 과거로 가게 되면 여성과 아이에게 혹독한 차별의 시대까지 가지만 그런 모든 고통들은 상대적이라는 데에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삶도 녹록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대범한 진단을 해본다.
94년 당시의 보편은 이런 것들을 포함해 사회적인 이슈와 재난과도 맞물려 있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주었다. 김일성의 죽음과 94 월드컵, 성수대교 붕괴사건은 은희의 가정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닌 사회적 현상으로 그 시절을 살아가는 모든 은희들에게 동일하게 있었던 일이었다. 같은 사건으로 감성을 공유하고 나누는 이들. 그들은 모두 보편에 속한 자들이었다.
영화 벌새는 오늘을 살아가는 또 다른 은희들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하다. 그리고 세상은 늘 사건과 사고, 각각의 가정사를 가지고 시간의 흐름을 여행한다. 오늘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지금의 코로나19와 같은 상황들과 개인의 다양한 가정사들. 그런 중에 곳곳에서 또 다른 은희의 스토리들이 생겨난다. 톨스토이는 <안나 까레니나>에서 이렇게 시작했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 삶은 다 제각각일 때가 많으니 오늘도 우리의 여러 가정사, 그리고 여러 사건, 사고들과 함께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은희에게 이 영화를 추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