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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분노> 사랑의 전제 불신과 이상향

오늘날 사랑의 전제

by 소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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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분노>는 이상일 감독의 작품이다. 감독이 한국 사람이라 시작할 때 흥미요소가 되기도 했지만 작품 분위기나 시청하면서의 느낌은 그런 것을 신경 쓸새 없이 일본 특유의 감성만이 드러나는 듯했다. 영화 내용은 한 가정에서 부부가 살해 당한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범인이 누군지 모르고 집 안에는 하얀 문을 도화지 삼아 怒(성낼 노)가 피로 끈적하게 쓰여 있었다. 그리고 대중에게 살인 용의자의 얼굴이 공개되고 몽타주와 미묘하게 비슷하게 생긴 세 명의 남자 이야기가 영화에 그려진다.



movie_image (5).jpg 오오니시 나오토 역
movie_image (2).jpg 타시로 요헤이 역
movie_image (3).jpg 타나카 싱고 역


이 세 명의 남자는 한 명씩 연인과 관계 되어 있거나, 또는 친구가 생긴다.





처음 사람을 사귈 때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가?


누구든 처음 사람을 만날때 의심을 한다. 친한 친구나 지인에게 소개 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럴 수 밖에 없는 세상이라는 걸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의심은 당연한 것이고 만약 의심없이 사람을 만난 다면 화를 입게 될 수 있다. 여기서 나오는 세명의 남자와 만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조금 의심을 하거나 또는 의심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남이 진행되며 외부의 영향으로 그들은 모두 각자 만난 남자를 의심하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며 우리가 하는 의심은 적절한 의심이 될 수도 있고 자칫하면 사람을 잃을 수도 있는 양면성을 가진 것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범인의 몽타주가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 공개되고 몽타주와 닮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살 수 밖에 없다는 걸을 보여준다. 범인을 잡고자 하는 시도가 되려 그 사건과 상관없는 어느 이들에게는 삶에 고통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기도 한다.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분명 좋은 의도와 더불어 그런 좋은 의도의 수해자들도 있지만, 나비효과에서 보듯 누군가 또는 어느 조직이 예상치 못한 피해를 받거나, 상처를 받는 쪽도 생겨난 다는 것을 안다면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조금은 넓어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양면성이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있을까?


처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좋은 뜻으로 하는 일들은 다 좋은 결과만 있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복잡한 연결고리 안에 살고 있다. 후기막스주의자들이 말한다는 Totality는 세상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연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과 속이 분명하게 나눠져 있다고 생각하는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들은 교회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전도사가 학생반을 맡아서 운영할 때에 아이들이 출석하는 학교 스케줄과 무관하지 않다. 그 스케줄에 따라 교회 학생반의 일년 계획에 영향을 준다. 교인들은 각자의 직장과 사회에서의 역할이 있음으로 그들의 생계와 관련된 스케줄에 따라 교회는 움직 일 수 있고 교회라고 불리우는 건물을 세우기 위해서도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신고할 것과 허가 받아야 할 것이 널려 있다. 종교라는 세계에 동떨어져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철저히 세상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글로컬이라는 말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글로벌한 세계와 로컬의 경계가 희미하다는 것을 본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을 만든 곳은 중국이고, 내가 사용하고 있는 애플 맥의 디자인은 캘리포니아에서 왔다. 그리고 내가 쓰는 글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생산되고 있다. 글로벌한 세상과 로컬이 연결된 글로컬에 살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내가 하는 일들은, 또는 다른 이들이 하는 일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더라도 양면성을 가지게 된다.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기독교를 전파했을 때, 유럽인들은 이런 행위를 선교라 말하지만 그곳 원주민들에게는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긴 것이었다. 나는 웃자고 한 이야기이지만 어떤 사람은 웃을 수 있고 어떤 이는 상처가 될 수 있다. 평론가 신형철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354. '황현산의 부정문'이라는 글에서 고 황현산 선생의 글의 위력을 설명하며 '~인 것은 아니다', '~라고 하기는 어렵다'라는 황현산 선생이 자주 사용했던 부정문을 소개한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말을 여백 없이 온갖 확신을 가지고 주장할 때, 황현산 선생은 '당신은 전적으로 옳지는 않다' 라는 것을 이런 부정문으로 부드럽게 주장의 여백을 늘려간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바의 좋은 서사는 승리의 서사이다. 세상을 턱없이 낙관하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행복과 불행은 늘 균형이 맞지 않는다. 유쾌한 일이 하나면 답답한 일이 아홉이고, 승리가 하나면 패배가 아홉이다. 그래서 유쾌한 승리에만 눈을 돌리자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어떤 승리도 패배의 순간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 역도 사실이다. 우리의 드라마가 증명하듯 작은 승리 속에 큰 것의 패배가 숨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큰 승리의 약속이 없는 작은 패배는 없다' 마지막 문장은 단호하지만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완전히 단호하지는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단호함이다. 단호한 승리도 단호한 실패도 없다 ... 늘 어떤 주장의 일면성을 지적하면서 이면을 가리켜 보여주되, 자신의 지적 자체도 일면적인 것일 수 있음을 동시에 의식하는 의식. 이것이 바로 '문학적 의식'의 한 본질일 것이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355-356.


그러므로 온전한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의심은 불신으로 시작되고 우리가 그 사람을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씩 나의 마음을 주는 단계로 흘러가게 된다. 처음부터 어느 최소한의 조건만 맞으면 원나잇을 할 수 있는 성욕의 발현을 예외로 봐야 하는지는 좀 더 고민해 봐야 한다. 그렇지만 하룻밤의 만남이라 하더라도 여러가지 조건과 처음 불안요소를 제거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런 가벼운 만남에는 오히려 상처가 적을 수 있지만 단계를 밟아가는 사랑의 신뢰에 금이 갔을 때는 큰 실망과 분노가 뒤따른다. 사실 인간은 인간을 다 알 수 없는데, 우리는 나의 한계를 정해놓고 그 범위 안에만 사람이 들어오면 안전한 사람이라 판단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내가 생각한 범위 안에 사람을 가둬두지 않는 사랑은 어디까지 가능할 수 있을까? 상대를 판단해 버리는 깊이가 깊은 결혼일 수록 불행할 수 있음을 우리는 예상할 수 있다. 나의 남편이나 아내는 내가 생각한 꼭 그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결혼이라는 또 다른 모험 가운데 우리는 내가 알던 이의 새로운 모습을 본다. 상대를 소유하지 않는 사랑.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건 사랑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은 신화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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