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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 May 21. 2022

나의 탄뎀 파트너(린)

인생은 타이밍, 탄뎀도 아마 타이밍.

내가 학교에서 제일 자주 가는 건물, 그러니까 내 전공 사무실이 있고 교수님 연구실이 있는 건물 앞에는 늘 작은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Willkommen을 포함한 각국 언어의 환영 인사에 "환영합니다"는 없었지만 그 건물에 들어갈 때마다 환영받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땐 그게 뭔지도 모르고 학교가 친절하네 정도로만 생각했다. 이럴 때 보면 난 참 낙관적인 건지 순진한 건지.


건물로 들어가는 출입구에는 각종 홍보 포스터가 붙어 있는 게시판이 있다. 거기에는 다양한 언어 교환 프로그램 홍보 포스터가 많았다. 외국어로서의 독일어, 불어, 스페인어, 폴란드어... 심지어 중국어까지 있었는데 한국어는 없었다. 사실 그 건물에는 (한국어로 옮기자면) 자습센터selbstlernzentrum 가 있었고 그곳에서 외국어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었다. 환영하는 간판 또한 그 센터에서 세워두는 거였고, 그래서 유난히 언어 프로그램 포스터가 많았던 것이었다. 참 대단한 걸 빨리도 깨달았다. 그중 내 눈에 유난히 띄는 건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탄뎀 프로그램이었다. 언어가 느는 게 더디다 보니 뭐라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센터의 인스타를 들어가 보니 독일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외국인 학생은 많은데 독일인 학생의 지원은 부족해 보였다. 뫄뫄국, 솨솨국에 관심 있는 독일인을 찾는 글이 가장 최근 게시글이었다. 근래에 한국으로 교환학생을 간다는 외국인 친구^들^의 말을 듣고, 그래도 한국어는 수요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희망을 안은 채 신청 메일을 보냈다. 나는 한국어, 영어, 독어를 할 수 있고 모든 탄뎀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면 누구나 좋고, 나는 불어랑 일어에도 관심이 있다고 선택지를 아주 아주 넓혀서 말이다. 탄뎀과 언어 교환을 하면서 한국어 과외 알바도 구상해 보고자 하는 것이 나의 큰 그림이었다.


며칠 뒤 답장이 왔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은 없지만, 문화 탄뎀ein interkulturelles Tandem에 대한 수요는 있다며 그걸 해 보라는 권유(를 빙자한 결정)였다. 독일어로 보냈으니 독일어로 답이 오는 건 당연한 것이고, 그걸 읽으면서 내용을 파악하자마자 하나의 메일이 또 왔다. "짠! 너의 탄뎀 파트너린이야! 연락처는 여기 있고, 궁금한 건 이쪽으로 연락 줘. 첫 탄뎀 프로그램을 위한 스타터 킷Starter Kit을 첨부하니까 참고하렴." 영어와 독어로 병기되어 있었는데, 내가 읽기엔 저렇게 통통 튀는 느낌이었다. 이제 시작이구나. 우선 첫 번째 목표는 나의 외향성을 끌어올려서 이 호기심 많은 탄뎀 파트너린에게 나를 어필하는 것이었다.


나한테 주어진 파트너린의 정보는 조상이 유럽에서 살았을 것 같은 성과 유럽+영어권에서 쓰이는 전형적인 이름, 그리고 학교 도메인의 이메일뿐이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이 친구는 나와 파트너가 된 것에 실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왜냐하면... 앞전에 용기 내서 갔던 외국인 학생 모임을 계기로, 안 그래도 바닥 치는 자존감이 급기야 땅을 파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아시안은 나를 포함해 딱 두 명뿐이었고, 그들의 분위기에 나는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사실 그럴 때마다 핑계는 나이였다. 난 그들처럼 힘과 체력이 넘치는 2000년대생이 아니라서, 바첼러가 아니라는 점도 왠지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모임 이후 잔디밭에서 술을 마신다기에 그럼 나는 이만 집에 가겠다며 별다른 수확 없이 집에 돌아왔었더란다. 그래서 탄뎀도 한국에 관심이 있는 학생을 만나고 싶었던 것인데, 이 유럽+영어권의 사람이 과연 나 같은 사람과 탄뎀을 하고 싶을까? 괜히 겁먹고 저자세를 취하게 됐다.


멘자(학생식당)에서 밥을 먹고 잔디밭 근처에 앉아 독일어로 메일을 적었다. 나는 독일어를 그래도 조금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이 방법은 나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대방에게 메일을 보낼 때 제법 유용하다.) "센터에서 너와 탄뎀이 되었다고 연락을 받았어, 탄뎀을 신청할 때 적었던 자기소개를 함께 보낼게. 아마 한국어를 배울 필요는 없을 테고, 대신 서로 독일어로 얘기하면서 독일어를 향상verbessern시킬 수 있을 것 같아. 그래도 나와의 탄뎀에 관심이 있다면 연락 줘." 그리고 정확히 2분 뒤에 메일이 왔다. 자기소개와 함께 날 만날 게 몹시 기대된다는 말이었다. 언제 만날까, 왓츠앱으로 마저 말하자며 휴대폰 번호도 있었다. 이건... 승낙인가? 그런데 하단에 영어 버전으로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뭐지? 하던 차에 메일이 하나 더 왔다.


"Was ein lustiger Zufall! 이게 무슨 웃긴 경우야!" 우린 동시에 서로에게 메일을 보냈던 것이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건 아니지만 간단하게 인사를 익히는 건 관심이 있다며, 본인도 불어를 배우고 있으니 나중에 같이 연습을 해도 좋겠다고 했다. 아무튼 독일어 연습을 먼저 하는 걸로 하고, 왓츠앱으로 연락을 달라기에 덥석 연락을 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일을 밀어붙이듯 진행했다. "나 지금 멘자 앞 잔디밭인데 혹시 너도 학교면 지금 잠깐 만날래?"


한국인이란 이유만으로도 나를 반기는 사람을 찾으려던 건 사실 내 욕심이고, 돌이켜 보면 상당히 편협적인 생각이었단 것 같다. 내가 누구든,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든 기꺼이 같이 얘기하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주인집 부부 분들도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이 지역의 외국인 유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받아 주시지 않았나. 나부터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주눅 들지 말고, 환영받을 생각을 그만둬야겠다는 반성이 들었다.


탄뎀은 이름, 나이, 학기, 전공까지 얘기했지만 어디서 왔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독일어를 잘하던데 과연 어느 나라에서 왔을지 궁금했다. 방금 수업이 끝나서 잔디밭으로 곧 오겠다는 탄뎀을 기다리며...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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