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생물학과 윤리
당신은 성선설이나 성악설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성선설은 맹자가 주장한 학설로,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하다는 견해이다. 이에 반해 순자는 인간의 본성을 악으로 규정하고, ‘예(禮)’를 법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 이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교정하고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주장이 옳은 것일까?
인간이 가진 선입견이나 편견은 대체로 후천적으로 형성되며, 누구나 위험에 처한 아이를 보면 도와주려는 마음이 생긴다는 점에서 보면 맹자의 견해가 합당해 보인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이 본능적으로 이기심과 욕심을 지니고 있으며, 때로는 타인의 물건을 탐내기도 한다는 점에서 보면 순자의 의견이 더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맹자와 순자가 말한 ‘선악의 기준’은 곧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규범, 즉 윤리나 도덕을 의미한다.
따라서 윤리의 기원을 살펴본다면,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판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윤리란 무엇일까?
그것은 과연 인간의 삶 속에서 어떻게 등장하게 된 것일까?
윤리(倫理)라는 한자어는 ‘인륜 윤(倫)’과 ‘이치 리(理)’자로 이루어져 있다. ‘인륜’이라 함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적 바른 길을 뜻하니, 이를 풀이하자면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적인 이치’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덕적인 이치라...
도덕은 흔히 인간의 의식적인 작용으로 생겨난 것이라 인식된다.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소크라테스는 도덕적 삶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한 인물로, 그는 도덕적 행위를 감정이나 본능의 산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선(善)은 앎이다”라는 명제를 통해, 인간이 도덕적으로 선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 선인지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는 자는 악을 행하지 않는다.”
- 소크라테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이 말은 인간이 도덕적으로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은 ‘의지가 나빠서’가 아니라, 무지를 인식하지 못한 결과, 즉 의식의 결여 때문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도덕은 본능이 아니라 이성적 자각, 곧 의식의 작용이라는 것이 그의 대표적인 사상이었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은 인간의 도덕적 관념의 근원을 탐구하기 때문에, ‘윤리’가 학문의 한 범주로 자리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견해는 오히려 순자의 성악설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순자가 말한 “예(禮)를 배움으로써 인간의 악한 본성을 억눌러야 한다”는 주장과, 소크라테스가 말한 “선(善)은 앎이다”라는 명제는 결국 같은 맥락을 지닌다. 둘 다 ‘배움’과 ‘앎’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교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통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도덕적인 이치’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린다.
‘이치’란 마치 ‘자연의 이치’처럼 사물의 정당한 조리나 법칙을 의미한다. 그 말인즉슨, ‘윤리’라는 단어 안에는 인간의 의식적 행동이 개입할 수 없는 어떤 법칙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뜻이다.
과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윤리가 정말 자연의 법칙처럼 작용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다윈의 ‘자연선택설’이 제시해 줄지도 모른다.
모든 생물의 존재 목적은 ‘종(種)의 영생’, 즉, '유전자의 존속'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말하는 영생은 개체의 영생과는 다른 개념이니 혼동하지 말자.) 어떤 생물이든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기 위해 행동을 조정하며, 유전자를 남기지 못한 종은 결국 지구상에서 그 생을 마감하게 된다.
오늘날의 생명체들은 ‘진화’라는 이름 아래 변이된 종들 중, 유전자를 성공적으로 남긴 존재들, 곧 자연의 선택을 받은 집합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인 인간 또한, 자연의 선택을 거쳐 살아남은 수많은 유전자들의 연속선상에 서 있는 존재다.
‘자연선택’이란 결국 변화한 환경 속에서 생존에 성공한 존재들의 결과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유전자는 하나의 생존 서명, 혹은 생존의 기억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유전자에는 어떤 기억이 새겨져 있는지 한번 들여다보자.
유인원, 그리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시작된 인류의 진화사에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습성 중 하나는 무리를 짓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동물들의 무리 사냥과는 달랐다.
그들에겐 공동 양육, 채집과 분배, 그리고 소통이 있었다. 그들의 무리는 단순한 집단이 아니라, ‘공동체’라 불릴 만한 형태였다.
공동체로서의 생존,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생존은 협력과 협동을 요구했다. 그 안에서 우리 고인류는 서로의 표정을 읽었고, 이를 통해 소통의 기술을 터득해 나갔다.
약 300만 년의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인간종 중에서도 더 나은 공동체를 조직한 종만이 그 유전자를 남길 수 있었다. 그들에게 영속성을 가져다준 가장 강력한 무기는 불이나 도구가 아니라, 더 크고 조직화된 공동체였다.
그리고 그 생존의 기억들 가운데에는 “어린 개체를 보호해야 한다”는 본능이 있었다. 어린 개체는 곧 종의 존속을 위한 유전자의 매개체였기 때문이다.
생명체의 가장 근원적인 충동인 생존 본능은 곧 유전자를 보호하려는 본능이었으며, 그 본능은 점차 어린 개체를 양육하고 보호하는 행위, 나아가 그 개체를 잉태하고 돌보는 암컷을 보호하는 행위로 발전했다.
결국 이러한 본능을 수행하지 못한 인간종은 유전자를 남기지 못했고, 도태되어 멸종함으로써, 수많은 인간종 중 오직 우리 호모 사피엔스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그리고 이 생존의 본능이 오늘날 ‘윤리’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유전자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유전자의 생존 기계를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생존 기계—즉 ‘로봇’—이며, 유전자는 우리 안에 들어 있는 불멸의 복제자이다.”
“이타적 행동은 유전자의 수준에서 보면 이기적일 수 있다. 개체가 자신의 희생을 통해 가까운 친족을 살릴 수 있다면, 그 유전자는 자신을 복제할 확률을 높인다.”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그러니 윤리란 유전자 안에 각인된 생존의 기억으로서, 자연의 법칙과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타인을 향해 동정, 보호, 사랑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자연의 이치를 담은 본능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곧바로 ‘윤리’라고 정의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인간의 이기심 또한 생존 본능에서 비롯되며, 그 본능은 같은 인간종의 생존 본능과 서로 충돌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맹자의 말도, 순자의 말도 모두 참된 명제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본능은 인류애를 말하지만, 동시에 그 본능 안에는 인류애와 상반되는 충동도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이 옳은가를 따지는 일은 우리의 삶에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더 나은 인류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맹자의 성선설은 흔히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단정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그 선한 본성을 어떻게 보존하고 확장할 것인가’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선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선함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수양하는 삶이었다.
순자가 말하고자 한 것도 결국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규정했지만, 그것은 인간을 비관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이 교육과 제도를 통해 스스로를 교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강조한 것이다. 즉, 본성은 악하더라도 배움과 예(禮)를 통해 선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우리는 성선설을 통해 인간에 대한 밝은 믿음을 유지하는 동시에, 성악설을 통해 우리 자신을 경계할 필요성을 함께 가져야 한다.
결국 두 사람 모두 같은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도 더 나은 인류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맹자가 심어준 믿음과, 순자가 일깨워준 경계를 동시에 품은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