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능력
태권도장을 운영하던 동생이, 유치원 교사인 동생의 여자친구가 그랬다. 반에 꼭 한두 명은 벌레 잡는 아이가 있다고. 가끔 교실에 곤충이나 벌레가 등장하면 연령 불문, 성별 불문하고 모두가 혼비백산이 되어버린다고. 그럼 아이들뿐 아니라 선생님도 그 아이를 앞세운다고 했다. 제발 벌레 좀 잡아주라며 말이다. 동생은 그 옛날의 우리와는 달리 요즘 아이들은 매일같이 자연을 벗 삼아 놀이하는 건 아니다 보니 곤충을 만날 일이 거의 없다고 했다. 특히 도시에 사는 아이들은 가끔 있는 숲체험에서나 곤충을 접하고 만져보는 시간을 갖는 게 다라고. 반에 한두 명 있다는 벌레 잡는 아이가 우리 집 첫째가 될 줄이야. 유치원 다닐 때부터 그랬다.
"엄마, 내가 오늘은 뭘 잡은 줄 알아?"
자주, 곧잘, 수시로 자랑처럼 늘어놨다. 그녀의 벌레잡이 영웅담을 듣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 12월 생이라 친구들보다 빠를 것도 없었던 평범했던 아이가 반 친구들의 히어로가 된 건 그때부터였다. 히어로는 자신의 역할을 인간들에게만 국한하지는 않았다. 생명은 모두 소중하다고 배웠기에 배운 대로 실천했다. 잡은 벌레들은 모두 창밖으로 던져줬단다. 그럼 언제고 그들은 살려줘서 고맙다며 인사를 건넸다고 했다.
아이는 그렇게 자랐다. 동식물과 교감하며 계속 커갔다. 인도 위에 떨어져 있는 곤충들을 구출하느라 무려 한 시간이나 학교에 지각한 적도 있었고, 식물이랑 대화하느라 집에 오는 걸 잊어버려 동네를 몇 바퀴나 돌게 만들기도 했다. 지각한 건 분명하게 잘못된 일이었기에 단호한 어조로 혼을 냈다. 더는 생물들을 관찰하다 지각하는 일은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곤충들을 종종 집으로 데려오곤 했다. 자신이 그 친구들의 상처까지 품어주겠다며.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첫째였다. 평소대로라면 텍스트로 안부를 전해 왔을 테지만 전화가 왔다는 건 별다른 일이 생겼다는 거다. 부디 큰일이 아니어야 하는데. 떨리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른 채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엄마! 내가 누굴 데려왔는 줄 알아? 글쎄 사슴벌레 애벌레를 데려왔어! 근데 할머니가 다시 데려다 놓으래. 함부로 키우는 거 아니래. 엄마, 얘 다쳤을지도 몰라. 구덩이에서 바둥바둥 몸부림치고 있었어. 내가 보살피다 낫으면 보내주면 안 될까?"
조금씩 피어오르던 걱정은 어딘가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피식. 내 입가엔 웃음이 피었다. 곤충 사랑은 여전하구나. 5살 무구하던 그녀의 꼬맹이 시절이 생각났다. 곤충과 대화하며 즐거운 놀이를 이어가던 그때가 불현듯 떠올라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할머니에게 받은 거절의 상처를 엄마가 토닥여 줄 거라고 기대하고 전화한 모양이었다. 엄마까지 안 된다고 하면 몇 날 며칠을 울고불고할게 반했다. 다친 친구를 그냥 보내야 했다고, 엄마는 인정사정도 없는 사람이라며 갖은 독설을 내뱉을 것도 빤했다. 그래, 듣고 싶은 말 해주자. 저렇게나 원하고 있는데. 게다가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손에 꼭 쥔 채 집에까지 데려온 수고도 있으니 조금만 키우다 방생해 줘도 좋겠다 싶었다. 바쁜 와중에 전화를 받았던지라 알겠다고, 할머니는 엄마가 잘 설득해 보겠노라고 간략히 말하고 끊었다.
퇴근 후 애벌레를 마주할 수 있었다. 조금은 귀여운 구석도 보였다. 다행이었다. 예상보다는 덜 징그러운 녀석이 우리 집에 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자꾸 보다 보니 이 녀석이 사슴벌레가 아닐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에서 단 한 번도 사슴벌레를 마주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방 애벌레쯤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녹색 검색창에서 사슴벌레 애벌레를 찾아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내 앞에 있는 애벌레는 휴대폰 사진 속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 사슴벌레 애벌레가 맞았다.
"대체 어떻게 알았어? 엄만 얘만 놓고 보면 사슴벌레 애벌레라고 생각 못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우리 딸 눈썰미가 정말 대단한걸! 성충은 얼마 후에나 만날 수 있는 거야? 너무 기대된다."
아이는 책에서 봤던 사진을 떠올렸다고 했다. 애벌레를 손에 올린 채 사슴벌레를 키워봤다는 친구를 찾아가 맞는지 확인까지 마쳤다고 했다.
"엄마, 나 궁금한 게 있어. 내가 얘를 키운다고 하니까 할머니한테 엄청 혼이 났거든. 근데 엄마는 계속 칭찬만 해 줘. 아까 나랑 통화할 때도, 지금도 그래. 어떻게 알고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 거야?"
"엄마들은 다 알아. 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왜 슬퍼하고 있는 건지. 그건 엄마들에게만 주어진 아주 특별한 능력이지."
부모가 되고 나면 얻을 수 있는 능력들이 있다. 의식하지 않았기에 카운팅을 하지 않을 뿐. 넘버링을 하며 세어간다면 아마 수십 가지, 많게는 수백 가지쯤 되지 않을까 싶다. 아이를 낳고 마주하는 그 순간부터 생기는 재능이 아니라 돌보고 키워내며 얻은 능력치가 부모로서의 자질을 부여했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었다. 수십 번의 시행착오와 부단한 노력 끝에 탄생하는 달콤한 성공의 결실인 것이다.
보고 있지 않아도, 듣고 있지 않아도, 함께 있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제일은 내 아이의 마음이 아닐까. 희한하게도 그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보이고, 들리고, 느껴진다. 생후 30일도 되지 않은 신생아를 키우던 그때를 떠올려 보자. 당시의 우린 아기가 배가 고픈지, 불편한지, 잠이 오는 건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확증이 없을 뿐 느낌으로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즉각 수유를 했고, 기저귀를 갈아주었고, 아기 옆에 누워 토닥이며 자장가를 불러줄 수 있었다. 그 시간들은 켜켜이 쌓이고 쌓여 서로에 대한 믿음과 존중으로 자라났다.
부모가 되고 생겨난 특별한 능력. 그건 아이와 함께 호흡하며 살아왔던 시간들이 주는 일련의 경험치가 아닐까. 그렇기에 스스로를 조금 더 믿어줘 보자. 아이의 마음을 읽었다면 필시 그게 맞을 거라고. 그렇기에 간과하지 말고 마음을 한껏 내어주자고. 뒤돌아 후회만을 일삼기엔 우리의 생이 그리 길지는 않으니까. 사랑해 마지않는 나를 꼭 닮은 아이에게 아낌없이 마음을 쏟아내 보자고.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늘을 마지막으로 살아내는 사람처럼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