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면성실함. 우리 부부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연애 때는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다가, 결혼 후 우리의 그런 면이 꼭 닮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린 열심히 벌고, 잘 모아서, 꼭 필요한 곳에 돈을 쓴다. 그렇게 결혼 2년 만에 전세자금 대출을 다 갚았고, 5년 만에 내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남편은 밤낮없이 일했다. 열심히 일했고 그 돈을 성실하게 모으다 보니 집 근처에 가게를 차릴 여윳돈도 마련할 수 있었다.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잘 운영했다. 그 경험을 토대로 또다시 서울에 가게를 오픈했다. 100평이 넘는 대형 매장이었고, 매출이 좋아 그 기세가 쭈욱 이어질 줄 알았다. 다가올 다양한 변수들을 고려하지 못한 채 부푼 꿈을 안고 두 번째 매장을 오픈했다. 그러나 두 번째 매장이 손님을 도통 끌어오지 못하자 브랜드를 바꾸며 가게 리뉴얼을 진행했다. 총 3개의 매장을 오픈한 셈이었다. 결과는 좋지 못했다.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가게를 정리하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고, 그동안 수없이 커다란 적자를 보느라 돈에 허덕이며 살아야 했다.
모든 매장을 정리한 지 벌써 1년 반이 지났다. 가게는 털어버릴 수 있었지만 그때 생겨버린 부채는 여전히 안고 살아가는 중이다. 매달 갚아나가야 하는 이자가 어마무시하다. 그걸 다 감당하기 위해 궂은 날씨에도 쉬는 날 없이 일하다 결국 몸이 상해버린 남편이 그저 안쓰러울 따름이다.
남편은 눈길에 미끄러져 왼쪽 정강이뼈 골절상을 입었고, 꽤 오랜 시간 병원에 있어야 했다. 그런 남편과 통화를 마치고, 아이들과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소란스럽게, 왁자지껄하게 샤워를 마쳤다. 욕실은 그야말로 웃음바다였다. 깔깔거리며 머리를 말리고 로션을 바른 뒤 아이들과 함께 욕실 나서는 순간, '띡' 하는 소리와 함께 온 집안의 불이 다 꺼져버렸다. 헤어 드라이기와 바디 드라이기, 그리고 건조기를 함께 돌려서 전력소모가 많았던 탓일까. 현관으로 가 휴대폰 불빛을 이리저리 비춰가며 두꺼비 집을 확인해 보았다. 이상이 없었다. 그럼 정전인가. 부엌으로 가 마주 보고 있는 아파트를 확인했다. 비상구를 제외하고는 불이 켜진 집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불이 나서 다 타버린 것마냥 온통 까맸다. 정전이 확실해 보였다. 휴대폰을 다시 켜고 동네 커뮤니티를 들어가 실시간으로 올라온 글이 있나 확인했다. 우리 아파트는 전기가 늦게 끊긴 편에 속했고, 저 아랫마을은 전기가 끊긴 지 이미 30분 정도 흘렀다고 했다.
불을 켤 수 없는 집은 처음이라 아이들은 무서워했다. 깊은 밤의 묵직함에 압도당했다고나 할까. 휴대폰 조명만으로는 어둠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나는 방으로 가 모든 서랍을 열고 휴대용 조명을 있는 대로 다 꺼냈다. 캠핑용 랜턴, 독서용 라이트, 휴대폰 2개. 아이들 손에 조명 하나씩을 쥐어주고도 두 개가 남았다. 그제서야 아이들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엄마, 우리 부자다. 불빛 부자!"
6살 둘째 말에 우린 까무러치듯 웃어버렸다. 저녁 10시가 넘어버린 야심한 밤. 어둠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여유라니.
조명 부자. 정말 그랬다. 오늘만큼은 우리도 분명 부자였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이 불빛이었으니까.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불빛이 우리에겐 넘칠 만큼 충분했으니까. 그래, 우린 부자였다. 아이의 순수함이 자꾸만 냉랭하게 식어가던 내 마음을 후끈하게 데워주었다.
정전으로 나가버린 전기는 쉬이 들어오지 않았다. 밤 12시가 넘도록 온 마을은 어둠에 잠겼다. 아이들은 잠들었지만, 나는 거실에 앉아 조명 하나를 켜놓고 고요한 그 밤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때론 편안함은 낯선 불편함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거라고. 잠시동안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었기에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창밖의 풍경은 마치 모든 것이 잠들어 있는 듯했다. 짙게 내려앉은 어둠이 꼭 이불 같았다. 꼭꼭 덮인 세상 아래, 우린 가만히 서로를 품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이 밤을 견디고 있었다. 어쩌면 견딘다는 말도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저 살아내고 있었을지도. 슬픔, 좌절, 용기, 희망 같은 감정들을 품고서.
짙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빛 하나로 우린 서로를 안아줄 수 있었다. 그 동력은 사랑이었다. 손으로 쥐고 다니던 조명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마음이 어둠을 밀어낼 수 있었다. 어둠이 또다시 우릴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작은 불빛 하나가 구석구석을 비추고, 마음까지도 따스히 데워줬던 그날의 그 시간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괜찮을 것 같다. 다시금 깜깜한 밤이 찾아오더라도, 우리는 분명 또다시 서로를 포근히 안아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