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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게 평범한 오늘

by 안개별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첫째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더 늘어서일까. 아이에게 종종 돈이 필요한 순간들이 찾아왔다. 문구점에서, 편의점에서 친구들 사이 혼자만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날들이 종종 있었다고 했다. 친구들이 젤리나 과자를 사면 한두 번씩 얻어먹을 수야 있었지만, 아이스크림의 경우 그냥 쳐다보는 게 다였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첫째의 얼굴이 너무도 담담해서 그게 더 마음이 아팠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와의 대화가 부족했던 탓에 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이 더욱 컸다.


아이에게 체크카드를 만들어 주었다. 카드를 분실해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아이를 탓할 수 없도록 돈은 한 푼도 넣어두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카드는 아이의 책가방 속에 잘 넣어두었다. 언제나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대신 돈이 필요할 땐, 엄마에게 전화를 하기로 했다. 그 이유를 듣고 아이스크림이든 젤리든 필요한 만큼의 금액만 입금해 주기로 했다.


드디어 처음 체크카드를 사용하기로 한 날이 되었다. 일하고 있는 도중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나 카드 써도 돼?”

"뭐 사 먹을지 정했어?"

"응, 젤리 두 개. OO이랑 같이 있어. 내가 사주고 싶어."


그동안 얻어만 먹었으니 오늘은 온전하게 젤리 하나를 사주고 싶다고 했다. 젤리는 하나에 2,000원. 나는 총 4,000원을 입금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문자를 남겼다. 입금이 완료되었다고.


잠시 후, 문자가 도착했다.

[체크카드 승인 2,000원 / ○○문구점]


숫자 하나 적힌 간단한 문자 하나였을 뿐이지만 그 순간, 이상하게도 벅차오르는 감정이 느껴졌다.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오늘은 자신이 쏘겠다고 큰소리를 치며 문구점에 들어서는 모습을, 친구와 둘이서 젤리를 고르며 신나게 떠들어 댔을 그들을, 입금 문자를 받고 카운터에서 카드를 내밀고 긴장하며 기다렸을 너를, 1+1 제품이라는 소리를 듣고 더없이 기뻐했을 얼굴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아이가 겪었을 상황과, 느꼈을 감정들을 상상하다 보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우린 함께할 순 없었지만, 함께 있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랄까.. 딸아이의 시간에 내가 겹쳐지는 그런 느낌이랄까.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하루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 첫째를 다시 만났다. 아이는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 들고는 나에게 다가왔다.


"엄마, 이 카드 어디서 찾았어? 진짜 너무 귀여워! 그리고 있잖아, 아까 젤리를 샀는데 1+1인 거야. 그래서 4,000원을 내야 되는데 2,000원밖에 안 냈어. 진짜 대박이지."


흥분 가득 담아 말을 이어가는 아이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말들이 어찌나 귀엽게도 들려왔는지, 하루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참으로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이의 모든 첫 경험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이 모든 일상이 절대로 평범하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을 수 있어서. 오늘이라는 시간, 우리가 살아낸 그 하루는 분명 귀하고도 값졌다. 그 시간들 속에 우리가 함께일 수 있어 실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의 첫 경험. 그리고 첫 도전과 용기. 아이에게 처음의 순간들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그저 조용히 바라보고, 기다려주고, 미소 지을 수 있는 엄마로 곁에 있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차근차근 알아가고, 배워가고, 익숙해져 가는 아이의 하루에 엄마의 자리에서 아이와 함께해 줄 수 있는 것. 그건 아마도 내 생에 가장 빛나는 행운을 잡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처럼 살아가야지.

평범한 하루를 마냥 흘려보내지 않도록.

이 눈부신 순간들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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