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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렇게 자라난다

by 안개별


시간에 쫓기듯 미친 듯 달려야 하는 그런 날. 금요일은 예외 없이 그랬다. 숨 돌릴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출근 시간부터 퇴근 직전까지,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지만 내달려야 했다. 그래야 제시간에 퇴근할 수 있었다. 엄마와 함께하는 금토일 2박 3일의 소중한 시간을 월요일부터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리 힘들 일도 아니었다. 밥만 먹고 자리로 돌아와 업무를 쳐냈고, 물도 평소 먹는 것의 반만 마셨다. 화장실 가는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지는 이유였다.



정신없이 일하던 오후, 첫째에게서 전화가 왔다. 별일 아니기를 바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엄마, 선생님이... 그게 아닌데, 먼저 발표한 친구랑 내용이 중복된다고 나보고 발표하지 말래."


별일이 맞았다. 아이는 펑펑 울고 있었다. 다짜고짜 중복이 된다니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눈물을 거두고 다시 차분히 얘기해 보라고 했다. 여전히 중간중간 꺽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대충 말의 요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준비해 간 것을 발표했으나 선생님이 바로 직전 발표한 친구와 내용이 같다고 했단다. 그래서 피드백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게 다 서러울 일이라고 했다. '서운할 일도 많다.'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괜찮다며 토닥였다. 살다 보면 더 큰 일로 눈물 펑펑 쏟을 날들이 많을 거라고, 이런 작은 일로 속상하지 말라고 했다.


"이게 왜 작은 일이야? 엄만 내가 얼마나 속상한 줄 알아?"


아차 싶었다. "많이 속상했지. 엄마라도 그랬을 거야. 눈물 나려는 거, 잘 참았어. 제법 어른스러워지고 있는걸."과 같이 말했어야 했다. 뒤늦게 아이의 마음에 공감 한 스푼 얹어보지만 늦어버렸다. 토라진 아이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자리로 돌아와 일하는 중에도 아이의 마지막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속상했겠다.' 그 말부터 해 줄걸. 뒤늦게서야 후회가 밀려왔다. 중요한 서류 작업 중에 받았던 전화였고, 정신이 팔려있던 탓에 아이의 속마음까지 깊이 헤아리지 못했다. 어쩌지. 더 늦기 전에 좋은 위로가 되어줄 수 있는 뭔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때 지이이잉.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전국 독후감 공모 안내]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시상식을 안내하오니
참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메시지가 도착했다. 얼마 전 제출했던 아이의 독후감 대회 수상 소식이었다. 노력의 결실은 동상. 초중고 학생부문 통합으로 진행했다 보니 나쁘지만은 않은 성적이라고 생각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받은 상이니만큼 더없이 기특했고, 아이의 감상이 심사위원들의 마음에 닿았다는 게 기뻤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타이밍이 정말 기가 막혔다. 첫째에게 이 소식을 전한다면 지금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지 않을까. 미소가 자꾸만 새어 나왔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누르며 복도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


"나나야, 독후감 대회 동상 수상이래! 축하해, 우리 딸. 다음 주에 상 받으러 오래. 그날 공연도 있어서 재미있게 놀다 올 수 있을 것 같아."

"응, 엄마."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상금의 액수까지 말해줬지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이런 리액션을 예상한 게 아닌데.


"기쁘지 않아? 초중고 언니, 오빠들 사이에서 네가 쓴 독후감이 뽑힌 거라고."

"그렇구나. 알겠어, 끊을게."


그렇게 또다시 끊겨버린 전화. 휴대폰을 바라보며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휴. 이젠 나도 모르겠다. 다시 자리로 돌아갔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더는 신경 쓸 수 없었다. 늦지 않게 퇴근하려면 하던 일에 집중해야 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 아이를 마주했다. 그리고 수업시간의 일에 대해 다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많이 속상했겠네. 엄마가 듣기에도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는 걸. 아마 선생님이 바쁘셔서 잘 못 들으셨나 봐. 그런 날들이 있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작은 것에는 집중하지 못하는 그런 날. 아마도 선생님에게 오늘이 그런 날이 아니었을까."


"그런 것 같기도 해. 선생님이 평소보다 많이 웃질 않더라."


"세상 일이 다 내 마음과 같이 펼쳐지지는 않더라고. 마음과는 다르게, 노력과는 다르게,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결과를 받아 드는 때가 있어. 그럼 당연히 슬플 거야. 그때는 울어도 좋아. 소리 내서 실컷 울어버리는 것도 방법이야. 그렇게 다 쏟아내고 나면 기분이 좀 괜찮아지거든. 아까는 엄마가 바빠서 이런 긴 얘기를 들려주지 못했어. 혼자 마음 삭히느라 힘들었지. 지금은 좀 어때?"


"응, 전화 끊고 많이 울었어. 그랬더니 괜찮아졌어."


기특해라. 아이를 품에 안았다. 말없이 다정한 위로를 건넸다. 가늘고 긴 첫째의 두 팔이 내 등을 조심스레 감싸왔다. 온기가 우리 사이를 서서히 채워갔다. 마음이 뭉근히 데워졌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우선시하며 살아왔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아이의 수상 소식에 한껏 들떠 있었다. 결과에만 집중했던 이유에서 정작 아이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나 만큼이나 본인 역시도 기뻐할 것이라 여겼다. 그건 오로지 나만의 착각에 불과했다는 건, 그리 늦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수상의 기쁨은 첫째의 슬픔을 품어주지 못했다. 아이는 홀로 감정을 삼키고 삭이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며 한 뼘 더 자라 있었다. 어쩌면 엄마로서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저 곁에서 기다려주는 것이었을 지도.



다음날 아침, 첫째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보통은 출근하기 전에 아이들을 마주할 일이 없는데, 전날 일찍 잠이든 경우 이른 시간에 눈을 뜨곤 했다. 출근 준비를 하던 나에게 첫째가 속삭이듯 말했다.


"엄마, 나 독서논술 선생님한테 화내서 죄송하다고 말하려고. 그리고 다음 주부턴 마음속으로만 속상해하지 않고, 내 생각을 잘 설명할 거야."


아이들은 자란다. 실컷 웃다가 또 울기도 하고, 삐치기도 하고 화도 내면서 다양한 감정들을 배워 간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조금씩 더 알아가는 거겠지. 동시에 세상을 배워가는 걸 테고. 그렇게 우린 매일, 매 순간, 자라고 또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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