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했던 동료 직원의 장례식장에 갔을 때, 나이 스물 일곱이었다. 나와 동갑이었고, 친한 친구였던, 잊지 못할 동료. 하룻밤의 사고였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울음은 끔찍했다. 자신보다 짧은 생을 살다 간 딸의 육체를 화장터로 보내야했던 어머니. 처절한 오열과 비통함 속 마지막으로 딸에게 전한 말을 8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내 딸로 태어나줘서 정말 고마워.. 잘가라 내 딸..”
4살이 된 아이의 눈망울을 바라볼 때, 가끔씩 8년 전 빈소에서 들었던 그 말을 기억한다. 내가 선택한 임신이지만, 아이도 부족한 나를 부모로 선택해주었다는 생각. 약 두 달 전, 아이를 지방의 시댁에 맡긴 뒤 아무래도 이전보다 부모로서의 책임에서 조금 멀어져 있었다. 그러던 중 일이 벌어졌다.
“선우에게 사고가 있어서 대학병원 와서 엑스레이 찍었다. 머리에 금이 가서 CT촬영까지 했는데, 다행히 내출혈은 발견되지 않았어. 깨면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해”
시어머니로부터의 메시지. 귀가 웅웅 울리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모두가 사무실에서 평소와 같이 일하고 있는데 나만 끔찍한 지옥으로 던져진 기분. 어린이집에서 체험학습을 하다가 놀이터 계단에서 굴렀다고 했다. 어린이집 메뉴얼에 따라 대학 병원에 갔고, 마취 후에 엑스레이와 CT촬영을 했다. 다행히 출혈 없이 머리뼈에 금이 간 정도로 그쳤다고 했다. 영상 통화로 처음 만난 아이는 좋아하는 과자를 물고 배시시 웃고 있었다.
어린이집을 잘못 선택해서, 내가 직장을 관두지 않아서, 내가 편하자고 아이를 맡겨서, 내가 제대로 아이를 살피지 못해서.. 모든 책임은 궁극적으로 이 상황을 만든 나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다른 어린이집을 선택했다면, 내가 직장을 그만두었다면, 내가 아이를 직접 가정에서 보살폈다면? 반대로 전제한들 그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어린이집에서는 이전에도 몇 번 아이들이 다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심한 사고는 처음이라며 거듭 사과했다. 사과를 받지 않고 아이가 다치기 이전으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휴대폰 너머로 거듭 들려오는 '죄송합니다'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다시 만난 아이는 잘 놀고, 잘 먹고, 잘 지냈다. 인지력에도 문제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마에서부터 퍼져나간 멍은 눈두덩이까지 깊게 내려와 있었다. 아이는 사다리만 봐도 자신이 굴러떨어진 계단이 연상되는지 이마를 움켜쥐며 다친 기억을 호소했다. 말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아직 '아빠', '엄마' 밖에 할 수 없는 아이의 표현은 몸짓 언어가 최선이었다.
사고 당일 정신 없는 와중에도 시댁으로 주문해둔 온갖 안전 용품들-모서리 보호대, 안전매트-을 위험해보이는 공간마다 붙였다. 손자의 일이라면 열 일 제치고 나서주시는 시부모님이 계시지만, 이런 것들은 아무래도 젊은 자식 내외가 챙기는 것이 수월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은 스스로 삶을 선택한 적이 없다. 어른들이 소환해서 세상으로 온다. 그렇게 세상으로 올 때, 한없이 부족하고 미숙한 나라는 사람을 선택해주는 것이다. 예기치 못한 사고까지 모두 대비하기는 어렵겠지만, 최대한 아이가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 그것이 부모의 역할, 어른들의 역할일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으로 불러낸 아이들, 그 아이들을 더욱 세심히 보살피고 사랑해줘야지. 그것은 아이들을 위해 모두가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