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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더하기 Apr 05. 2022

나를 알아봐 줘서 고마웠다

백합꽃 같은 그녀



그녀를 만난 건 20년 만이다. 만우절 날 거짓말처럼 그녀를 만났다. 그녀를 본 그날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직원과 저녁을 먹으러 간 숯불 돼지갈빗집에 그녀가 남편과 함께 모임을 하러 왔다. 고기를 굽고 있는데 나를 알아보고 20년 전 그때처럼 잡티 하나 없이 하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동갑인 그녀와 나는 같은 아파트에서 살았었다. 아이들도 나이가 비슷해서 집으로 마실을 다니며 친하게 지냈었다. 솜씨 좋은 그녀는 한겨울에 오이소박이를 만들어 맛보라고 가져다주기도 했었다. 듣기 싫은 이야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기억이다. 새해 첫날 축복의 말을 전하 듯 만나는 사람마다 칭찬했다.

"어머 바지가 잘 어울리네요".

"어머 오늘 머리 스타일 멋지다".

사람들은 그녀의 섬세한 칭찬을 좋아했다. 아이를 낳고 머리도 간신히 감고 지내던 삶이 전쟁이었던 시기에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자기는 긴 속눈썹이 참 이뻐"

여자임을 상기시켜주던 그 한마디는 꽃 한 송이 받은 듯 하루를 설레게 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좀 더 넓은 집이 필요해졌을 때 그녀와 난 서로 다른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우유병을 들고 다니던 우리 집 막내가 군대에서 짬밥을 먹는 나이가 되는 기간 동안 그렇게 각자 잊고 살았었다.




그녀가 먼저 전화번호를 교환하자고 하자고 했다. 번호를 저장하고 그녀는 조만간 연락한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집에 와서 늘 그렇듯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미니시리즈 드라마를 보고,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잠들 시간을 채워갔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가 궁금해졌다.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았었을까? 저장한 전화번호 덕에 그녀는 sns 친구로 등록이 되어있었다. 메신저 프로필 사진에 올라와 있는 가족사진 속 백합꽃같이 흰 얼굴의 그녀를 남편은 어깨동무를 해서 살포시 안고 있었다. 세 딸은 성인이 되어 어려서 보았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좀 더 안으로 그녀를 훔쳐보기 시작했다. 쇼핑몰 모델이 되어 있는 큰딸은 엄마를 닮아 예쁜 얼굴에 늘씬한 모습으로 '엄마의 자랑'이라는 글귀와 함께 여러 장의 사진들이 보였다. 그녀는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화가가 되어있었다. 여러 번의 수상 경력과 초대전을 알리는 글도 있었다. 걸레를 들고 아이들이 거실에 엎질러 놓은 음료수를 닦던 내 기억 속 아이 셋의 엄마가 아니었다. 물감으로 군데군데 얼룩이 묻은 앞치마를 두르고 작지만 초록 화분들이 싱그러운 작업실에서 집중한 모습으로 붓을 들고 캔버스에 색칠을 하고 있는 사진도 보였다.


그녀의 일상을 보고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신 것처럼 잠이 달아났다.

만우절 날 저녁 알게 된 그녀의 거짓말같이 꿈을 이루어 가는 삶이 나를 자극했다. 20년간 난 무엇을 하며 살았나? 난 무엇이 되어 있나? 생각에 잠겼다. 비스듬히 소파에 누웠던 몸을 바르게 고쳐 앉았다. 18년째 다니는 회사 일 말고는 이렇다 할 게 없다. 이렇게 가난한 인생이었나,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는 건가도  싶었다.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엉킨다.


잠들지 못하는 건 묻어 두었던 꿈 때문이었다. 너무 오래전이라 어디에 묻었는지 생각마저 안 나는 꿈.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기를 멈추고 자리에 누웠다. 꿈의 씨앗에 정성을 들여 꽃으로 피우고 싶어진 마음에 정신은 더 맑아졌다.  여러 가지 핑계로  쓰다 말았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고, 내일은 그녀에게 내가 먼저 연락을 해봐야겠다.


백합꽃같이 기분 좋은 향기가 나고 흰 얼굴을 보노라면 마음마저 환해지는 그녀가 나를 알아봐 줘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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