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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더하기 Nov 21. 2023

밝힐 수 없는 친구의 선물의도

고2 때 짝꿍의 생일 선물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시인 그리고 처음 보는 시집의 제목 책장을 넘기자마자 시인이 누구인지 찾아보았다.

2월 16일 나와 생일도 같은 이 시인은 누구일까?

시인 기형도 1960년 경기도 연평 출생 연세대학교 정외과 졸업 84년 중앙일보사 입사 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안개] 시 당선 89년 3월 타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시집 이란 소개 글을 보고 시집을 넘겼다.

나는 모든 책을 읽을 때 버릇이 차례를 보고 맨 뒷장의 해설 또는 작가의 말을 읽고 제대로 본문을 읽는다.

그 책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이다.

해설-영원히 닫힌 빈 방의 체험 해설(김 현)


차례의 1번은 신춘문예에 당선된 안개라는 장편의 시가 자리 잡고 있었다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

.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나는 여기에 밑줄을 그었다. 책을 읽은 흔적이 남지 않게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이 시집에는 처음 읽으면서 줄을 그었다.

그것도 파란색 볼펜으로 말이다. 이런 시구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감탄을 하면서 줄은 늘어갔다.


93년도에 그었을 밑 줄


마스크를 낀 승객 몇몇이 젖은 담배 필터 같은

기침 몇 개를 뱉아내고


세 번째 자리한 조치원이라는 시에서 나는 기형도란 시인에 푹 빠져들게 되었다. 그 시절 나는 글이란 것을 쓴다고 노트 이곳저곳에 말도 안 되는 시를 시늉하며 글을 흘리고 다니던 때였다.

조치원이란 시까지 읽고 나는 이 시집을 선물 한 짝꿍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친구야 글이란 것은, 시란 것은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쓰는 것이란다."

알려주려고 그러니 꼴값 떨지 말고 국어책이나 보거라라고 빈정대려고 사준 것이 아닐까란 생각.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 [사랑을 읽고 나는 쓰네]는 읽을 때마다 마치 내가 당장 이별이라도 하고 온 듯 가슴이 아리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람 빈집에 갇혔네


앞서 책 이야기에 썼듯 나와 같이 나이 들어갈 [담]이라는 책과 더불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책이 바로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이다]

가난의 유년 시절 혼란의 청년기까지 어쩌면 우울한 시들, 그림을 그리는 듯한 시구절들 속의 천재적인 표현력

나는 이 책을 접하고 글 같지 않은 글을 쓰는 작업은 모두 멈추었다.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는 일깨움을 받은 것이지만 절필? 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너무 쓰렸다.

내 딴에는 중앙지에 시도 실렸었고 초등학교/중학교 때는 희곡을 써서 체육대회 날 전교생을 모아 놓고 연극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나름 잡초지만 생명력을 가진 풀떼기 정도(열심히 쓰다 보면 꽃봉오리는 아니더라도 잎이라도 되지 않을까란 희망도 안고)는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내가 이 시집을 잘 모셔두었다가 다시 꺼내게 된 것은 올해 [기형도 플레이]이라는 연극이 올려진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하던 날이었다.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에서 서울특별시와 서울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올려지는 무대.

시를 가지고 연극을 한다고? 어떻게?  그래 [위험한 가계, 1969]는  시가 단편을 보는 듯 내용이 있으니.....

하지만 연극은 9편의 시를 가지고 시와는 다른 내용으로 희곡을 쓴 것이란 것을 연극을 보러 가서 알았다.

기형도의 마니아들 때문인지 연극을 하는 배우의 팬들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일찍부터 매진이 되었다.

연극은 하루에 5편 정도로 나누어 공연을 하고 마지막 날에만 9편 전편을 보여주었다. 나는 전편을 다 보고 싶어 막공을 선택했는데 올 초부터 시작한 배우 덕질 덕에 ㅎㅎ(배우가 7월부터 9월까지 연극을 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보러 가기 위해 예매를 했고, 예매와 취소 티켓을 잡는 법을 어느 정도 숙지한 상태였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자리 하나를 잡을 수 있었다(그래 뭐든 계속하다 보면 실력 발휘할 날이 오는구나

덕질이 빛을 발한 표


몇 편의 연극은 웃음을 주었고 몇 편은 깊은 생각과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만났고 몇 편은 눈물을 흘렸다.

시를 가지고 만든 연극이라니....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기형도란 이름과 입 속의 검은 잎이란 시집은 어느 형태가 되었든 나를 이끌게 하는 마력이 있다. 짝꿍의 선물이 절대 비아냥이 아닌 친구야 이런 좋은 시도 있으니 읽어 보렴 하고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 친구는 어떻게 이 시인을 안거지?

글을 쓰는 것을 멈추게 했던 입속의 검은 잎 시집은 이렇게 글을 다시 쓰게도 만든 소중한 책이다.


값 3,000원 세월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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