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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리의 사색가 May 24. 2024

혹시 자유를 사랑하십니까?

자유에 대한 복잡한 생각들

우리는 언제 살아있다고 느끼는 걸까? 피부로 느끼며 진정 삶을 너그럽게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 가령 진심으로 삶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며 당당히 걸으며

웃음과 함께 춤을 추면서 태양의 뜨거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내일의 아침놀을 위해 살아간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자유. 그 이름은 자유일 것이다. 자유란 강함과 사랑을 동시에 겸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강함이란 소중한 것을 책임감 있게 지킬 수 있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동시에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슬픔을 견딜 수 있음과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과 같다. 사랑이란 냉정함이나 무심함과는 다르게 인간됨과 그 정을 의미한다. 자유란 춤을 추는 것과 같고 어느 순간에도 그것이 표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글을 쓰든 노래를 부르든 운동을 하든 일을 하든 음식을 먹든 무엇이든지 말이다. 니체는 이런 말을 했다.




한 번도 춤추지 않았던 날은 잃어버린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하나의 큰 웃음도 불러오지 못하는 진리는 모두 가짜라고 불러도 좋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춤추는 사람_ 핀터레스트>




체조선수나 운동선수들은 자신의 신체를 자유롭게 가지고 논다. 여기서 가지고 논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몸을 제 멋대로 움직여도 부끄럼 없이 흔들림 없이 그저 열정과 즐거움에 몸을 맡기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 한번 코너 맥그리거처럼 또는 마이클 타이슨이나 영화 <록키>에 나온 주인공처럼 몸을 자유롭게 움직여 리듬감에 맞추어 스텝을 밟으며 허공에 대고 주먹을 날린 적도 있다. 슥슥! 하는 소리가 들려 영화처럼 내 주먹의 스피드가 상상이상으로 빠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고 소리의 근원지는 옷이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였다. 그 순간에 내가 입은 오래된 니트의 긴팔 부분이 헐렁헐렁해서 그런 소리가 난 것이었다.




내 이야기를 하면 나는 책을 읽고서 자유를 고민하게 된 것 같다. 여기서 한 가지 내 견해를 말해보면 책을 읽고서 자유를 느꼈다면 아마 그 사람은 매우 지루한 사람일 것 같다. 책 속에는 해답과 그리스 영웅들처럼 특정 인물이나 위인들을 보고 그들을 본보기 삼아 행동할 수 있는 동기와 에너지 그리고 자신의 잠재력을 깨워줄 믿음도 분명 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앎보다는 행동에 더 정답이 있으며 실천하지 않고서는 수천 권의 책도 소용없는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내적 만족감과 흥에 넘치는 즐거움을 느꼈다고 해서 내가 노을 지는 해변가에서 춤을 추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노동 후에 이루어진 휴식이 더 달콤하며 값진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지금까지도 책을 통해 자유가 무엇인지를 찾아 나서며 일종의 명상상태를 체험하고 거기서 매우 편안한 상태를 느낀다. 문학이라는 것이 가끔씩은 치유의 효과를 주기도 하며 행복과 고요함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삶을 투쟁해 보겠다는 용기보다는 차라리 내면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둘은 같은 노력을 요구하지만 내게 더 맞다고 느끼는 쪽으로 노력한다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난 아직도 자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언제 한 번은 자유보다 독서하면서 느껴지는 고요함을 유지하거나 지키는 것은 어떨까? 생각했다. 물론 내면의 평화도 자유못지않게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삶의 고난이나 그 달콤한 정기를 다 빨아먹지도 못한 상태에서 나는 어떤 인간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하고 질문하면 왠지 모르게 괴롭다는 생각이 든다. 용기를 얻었다고 해도 막상 움직이려고 하면 망설이게 되는 것처럼 확실히 보장되지 않는다면 실행하기가 힘들게 느껴진다.




제 한 번은 지금의 생이 더 편하고 고요하다는 것을 느끼려고 육체적 노동을 해본 적도 있었다. 우체국이나 공장. 아님 여러 알바들을 경험해 보면서 지금의 상태가 가장 즐겁고 자유로우며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과정도 결국 행복이니 자유니 하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 한 가지 깨달음을 준다면 그저 힘든 일을 하고 지금 삶이 더 소중하다는 것만 느끼지 아무런 변화도 내게 찾아오지 않았다.




난 과거에 자유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자체를 살짝 두려워했고 부처처럼 명상을 통해 내면의 평화를 찾으려고 했다.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쾌락이나 경험보다는 고요함을 택한 것이다. 한마디로 삶을 제대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한번 제대로 깨져보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며 지성을 살찌운다는 핑계로 육체의 즐거움과 새 생명과 기운을 가져다줄 음식을 거부하기도 했다.

음식을 거부하게 된 이유는 그것이 단순 유체적 결핍을 채울 뿐이며 생존을 위해서 음식을 적절히 섭취한다면 문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식가는 유충상태의 인간이라고 소로우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분명 소로우는 어느 정도 자신의 사상을 따를 만큼의 정신력과 본연의 기질을 갖추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님 천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했다든가. 둘 중 하나일 것 같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처음에는 자유에 대한 나의 의견을 이야기하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그것이 점점 알 수 없는 것이 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인생을 제대로 살기 전에는 자유라는 것은 정의하거나 찾아 나서면 안 되는 것일까?

아님 내가 누구인지를 먼저 아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일까?



붓다는 분명 깨달았을 것이다.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부터 나온다라고. 자유를 찾으려는 내가 실은 오히려 점점 더 먼 길로 돌아서 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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