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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열 Nov 03. 2023

당직, 숙직

드디어~

오늘이 토요일이다.


그리고 보니 이번주 내내 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밤 10시 전에 퇴근해 본 기억이 없다.

퇴근은커녕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숙직방에서 잠을 잔 날이 이틀이나 있었다.

그것도 숙직방에서 이불을 덮고 베개를 베고 잔 것이 아니라 구석진 자리에서 당직복을 덮고 잠을 잤다.


그런 나에게 토요일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저녁부터 내일 하루종일까지ㆍㆍㆍ


어른들은 토요일을 일컬어 반공일(半空日)이라고도 불렀다.

일을 하지 않는 일요일을 공일(空日)이라 한 것으로 미루어 하루의 반만 일을 하는 날이라 그리 불렀을 터이다.


80년대 초 은행은 오전 9시 30분에 문을 열고 오후 4시 30분에 셔터를 내렸다.

토요일은 같은 시간에 문을 열고 오후 1시 30분에 내렸다.


지금 은행의 전산은 발전을 넘어 인공지능기술까지 가미되었지만 내가 신입행원 시절에는 아주 기초적인 것만 온라인이라는 이름만 빌려 전산 흉내를 내고 있었고 나머지 일은 주판과, 자주 똥을 닦아줘야 하는 볼펜으로 처리를 해야 했다.

- 당시 신정연휴를 3일간 하였던 것이 각 은행들이 전년도 결산업무가 하루이틀에 끝나지 않아서라는 說도 있다.

사실여부는 정확하지 않다.


토요일~

대부분 오후 1시 30분에 문을 내려도 아직 업무를 처리하지 못하신 고객들이 객장에 가득 앉아 계셨다.

특히 매월 25일과 말일은 더 그랬다.

그런 날 객장에서 일하던 선배 직원들 대부분에게 점심식사는 언감생심이었다.

아주 늦게 점심을 챙겨 먹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보다 아예 건너뛰는 사람의 수가 훨씬 많았다.


그 시절 은행원들 대부분은 위장질환을 훈장처럼 달고 다녔다.


오후 4시쯤이 되면 부서별로 몇몇이 (영업점에서 계별(係別)이라 하였다) " 퇴근합니다 "하며 퇴근을 하였지만 이마저도 같은 부서에 나머지 일을 맡겨도 될 만큼 만만한 후배가 있을 때나 가능하였다.


그때 아직 신입의 딱지를 떼지 못하였던 나는 공과금 수납업무를 담당하였다.

지점에서는 국고계라 불렀는데 대부분 손 빠른 여자행원들이 담당하였지만 윗분들이 내가 성격이 꼼꼼하다는 이유로 남자인 나를 그곳에 앉혔다.


물론 그 업무를 담당하는 正의 자리에 일이 능수능란한 최고참 여자선배님의 옆에 내가 앉았고 나는 그 선배님 옆자리에 副자를 달고 앉았다.

여자선배님을 주임이라 하였고 나는 보조의 역할이었다.


그렇지만 그 최고참 여자주임님은 덩치가 큰 사냥감을 사냥할 때 그 사냥감을 움직이지 못하게 물고만 있는 수사자의 역할만 하셨다.

이후의 모든 사냥감 요리를 하는 암사자의 역할은 신입인 내가 하였다.

선배님은 국고계의 큼직한 것들만 챙겼고 나머지 자질구레한 업무는 전부 내 차지였다.


지금이야 거의 모든 공과금을 자동이체로 납부하거나 영업점에 가더라도 CD기에서 처리하지만 그때는 자동이체라는 단어도, CD기라는 단어도 없었다.


단돈 백 원짜리 공과금도 은행창구에서 직접 납부해야 했다.

그런데 그때 우리나라 공과금 대부분은 납부기일이 25일이거나 말일로 되어 있었다.

25일과 말일은 은행문 밖 30여 m까지 공과금을 납부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고 춥고 더운 날 아이를 업은 여자 고객분을 줄을 선 사람들이 먼저 들여보내 주었다.


그때 그 끝이 보이지 않았던 공과금 줄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내 꿈에 나타나곤 한다.

18살 어린 내게는 그 긴 줄이 또 점심을 굶기고 밤샘을 해야 하는 것으로 트라우마였나 보다.


25일과 말일

그런 날 나는 아예 숙직을 자청해서 했다.


그날은 아무리 서둘러도 밤 10시는 되어야 내 업무가 마감이 되었고 그것도 한 번에 딱 맞았을 때나 가능하였다.

자칫 11시가 넘어서 마치면 통행금지 때문에 합숙소까지 가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월말과 25일이 지난 월초(月初)의 토요일

내가 얼마나 기다린 날인가?


아직 얼굴에 솜털이 뽀송거렸던 18살 나이에 혼자 집을 떠나 객지에 있었던 나는 자주 집과 친구들이 그립고 보고 싶었다.

(나의 집은 대구였고 내가 근무한 은행은 울산에 있었다)


아침에 합숙소를 나올 때부터 내 마음은 이미 대구에 가 있었다.


내가 대구 고속버스 터미널에 내리면 내 친구 원달이와 수기, 재철이가 미리 와서 나를 기다릴 것이고 나는 그들과 같이 저녁을 먹고 호프집에서 500cc 맥주를 마시면서 고등학교 시절 해보지 못하였던 탈선(?)을 할 것이다.

통행금지 시간이 임박한 시간에 우리 넷은 술을 깬다는 이유로 DJ가 있는 음악감상실에서 통금이 해제될 때까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팝송을 들으면서 괜히 머리를 흔들어 으로 장발의 머리를 으며 네 명 중 혼자 양복에 구두를 신은 나는 온갖 폼을 다 잡을 것이다.

  - 술을 마시지 못하였던 나는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한 세 친구들에게 저녁을 사고 술값을 내주고 친구들이 해주는 고맙다, 내 친구 대단하다는 말에 목에 힘을 있는 대로 넣어 가오만 잡았다.


토요일 4시간의 영업시간이 평일 8시간의 그것과 같이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구내식당에서의 점심은 안중에도 없었다.


어서 업무를 마감하고 대구로 가서 친구들을 만나 그들의 환대(?)를 받고 싶은 생각들로 가득 찼다.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와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번갈아 가며 백번도 더 보았다.


내가 기다린 시간보다는 훨씬 늦게 갔지만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덜덜거리며 셔터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25일도, 월말도 아니어서 셔터가 내려오고 20여 분 만에 객장에 앉아있던 고객들도 한분도 없었다.


내 손이 더 빨라졌다.

오후 2시가 훨씬 넘었는데도 희한하게 배도 고프지 않았다.

주판으로 오늘 수납한 공과금의 합계를 계산하면서도 

내 주판 실력이 이 정도인가?


나는 주판의 神인가?

혼자 감탄도 하였다.


오후 4시.

오늘 수납한 공과금 금액과 내 시재( 창구 텔라들이 들고 있는 현금 )가 딱 한 번에 일치하였다.

기적처럼 느껴졌다.


선임 선배님들은 늘 한 번에 이 둘이 딱딱 맞았는데 신입인 나는 한 번에 맞춘 적이 거의 없었고 늘 두 번, 세 번의 검산 끝에 맞았을 만큼 어리바리하였다.


그런데 오늘은 이 어려운 것을 내가 한 번에 맞추었지 말입니다. ㅎㅎ


혼자 쾌제를 부르면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복도에 서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학창 시절 선생님들이 그렇게나 단속하고 감시하였던 담배를 이제 당당하게 내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꺼내 피울 수 있다는 것도 그때 나에게는 작은 행복이었다.


담배를 문 내 모습이 꼭 주윤발처럼 멋있게 느껴졌다.


반도 피우지 않은 담배를 이내 재떨이에 던졌다.

그 한 개비를 다 피울 만큼 내 마음이 여유롭지 못하였다.


자리로 돌아가 책상밑에 두었던 작은 가방을 들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인사하는 목소리가 군 시절 사열을 하던 사열병의 목소리보다 크고 우렁찼다.

" 주말 잘 보내이소.

저 집에 댕기 오겠습니더.

월요일에 뵙겠심더 "


나 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선배님들은 그런 나를 귀엽다는 듯 앉은자리에서 쳐다보면서

" 오냐, 니 잘 댕기온네이.

집에 가서 엄마 밥 마이 묵고 온나 "

하셨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자 철문으로 굳게 닫힌 후문이 눈앞에 보인다.

이제 저 문만 열고 나가면 나는 집에 간다.

지금부터 월요일까지 은행에서 해방된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마음도 급해진다.


10m도 안 되는 거리인데도 뜀박질이 나왔다.


후문에 도착해서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 종열이 니 어데가노?

니 오늘, 내일 일숙직 인거 모르나 "


환청처럼 들렸지만 실제로 또렷이 들렸다.

1층 객장 맨 끝에 자리를 한 당좌예금 주임님의 목소리였다.


숙직이라니?

그것도 토요일에ㆍㆍ


지금처럼 무인경비가 없었던 그때는 남자직원들이 순번으로 숙직을 하였는데 그 숙직은 [ 당직 명령부 ]

에 일자와 당직자를 기록해서 미리 지점장의 결재를 받아 두었다.

그런데 그때 오늘 나는 당직이 아니었다.


망부석의 모습으로 서 있는 내게 그 당좌주임님이 그랬다.

" 사실은 오늘 내가 당직인데 내가 각쮀(갑자기)집에 일이 생깄뿠다 아이가.

오늘 아침에 집에서 연락이 왔는데 당직명령부에 종열이 니를 대무(代務)로 내고 지점장님 결재도 받았는데 내가 니한테 칸다 카는기 고마 이자뿟다.

니 수고 쫌 해도 "


입행하고 선배님들로부터 수십, 수백 번 더 들은 말이 있다.

" 선배는 하느님 하고 동기동창이다 "


'선배님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는 못합니다.'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말이 입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잡고 있던 후문 고리를 놓았다.

저절로 놓아졌다.

2층에서 신나게 뛰어 왔던 1층에서 이번에는 2층으로 기다시피 다시 올라갔다.


당직실로 가서 당직복으로 갈아입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조금 전 내가 담배를 던졌던 재떨이가 있는 1층으로 가는 계단에 다시 섰다.

내가 버렸던 담배에서 아직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담배연기를 보면서 혼자 구시렁 거린다.

" 아~

하느님

우리 당좌주임님하고 동기동창이 맞습니까? "


뒷날 들은 이야기로 그날 내 친구 셋은 두 시간 동안 대구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나를 기다렸다고 하였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날 내게 당직을 시키신 그 당좌주임님이 노환으로 투병 중이라고 하였다.

그때는 밉고 원망스러웠지만 그 당좌예금 주임님이 보고 싶고 마주 앉아 차 한잔하고 싶다.

'어서 쾌차하십시오.

주임님~

세월이 흐르고 난 지금 주임님이 저의 아름다운 추억이었네요'


40년이 훨씬 더 지난 토요일 그날 

나는 이틀간 갈비탕과 짜장면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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