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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열 Apr 23. 2024

은행원이었던 나는 수포자였다.

울산지점으로 출근하라는 지점발령 통지서를 받고 첫 출근하기 전 

나는 문구점으로 가서 펜과 잉크를 사서 글씨연습을 하였다.


그날 나는 은행원은 무엇보다 글씨가 깨끗하고 정갈해야 한다는 생부(生父)의 말씀에 한글과 한자, 그리고 숫자를 펜으로 정성스럽게 쓰고 또 썼다.


그즈음 나에게 글씨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말씀하신 분은 비단 생부만이 아니셨다.

내가 3년간 다녔던 고등학교(나는 상고를 졸업하였다) 3학년 담임선생님나와 같은 반 아이들에게 생부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모름기지 소인(小人)들은 자신의 외모를 가꾸기에만 몰두하지만  대인(大人)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며 그 마음을 표시하는 말에는 무게가 있고 신의가 있으며 글씨는 항상 휘갈기지 않고 정성스럽고 단아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생부와 담임선생님 두 분의 말씀은 표현방식이 달라서 그렇지 글씨는 깨끗하고 정갈해야 한다는 뜻은 같이 하고 있었다.


생부의 은행원에 대한 선입견은 은행원들은 정확히 2:8의 짧고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하얀 와이셔츠, 그리고 잉크를 찍어 펜글씨로 장부정리를 할 것이라는 어쩌면 약간 무지(無知)의 선입견이셨고, 고교 담임선생님은 전공이 국어과목이셔서 무릇 사람들의 인격은 입을 통해서 내뱉어지는 말과 손으로 쓰이는 글씨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다소 당신 혼자만의 철학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어쨌든 덕분에 나는 고교 2학년 때 펜글씨 2급 자격증을 취득하였고 나의 자격증 취득을 생부는 기특하게 여기셨고 담임선생님은 당연하다고 여기셨다.


81년 11월 11일


계절은 가을의 문턱을 훨씬 지나 겨울로 접어들고 있을 때쯤 나는 학생의 신분에서 사회인으로의 변태를 시작하고 있었다.


본점에서 통지한 대로 생모와 함께 고속버스를 타고 ㅇㅇ은행 울산지점으로 갔다.

고속버스 안에서 나는 내가 쓴 글씨에 선배직원들이 깜짝 놀라는 모습을 상상하였다.


지금 다시 생각하여도 실소가 저절로 나온다.


그러나 지점으로 들어서 청원경찰 아저씨의 안내로 객장 안으로 들어선 순간 버스 안에서 하였던 나의 상상은 일순간 해프닝이 되었고 은행원은 글씨가 어떻고 하셨던 생부의 생각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생부만의 선입견이었다는 것을 보고 또 깨달았다.


모름지기 대인은 글씨가 깨끗하고 정갈해야 한다고 하셨던 담임선생님 말씀도 현실성 없는 학문용  철학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도 보고 또 깨달았다.


선배직원들이 앉아 일하고 있는 객장 안의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 물 밖에서 우아하게 헤엄치는 고니의 물속 발놀림 같았다.

객장 밖에서 보기에 깔끔한 화이트칼라의 모습과는 달리 안에서 본 은행원의 모습은 바빠도 너무 바쁜 모습이었다.


내가 그토록 공들이고 다듬었던 펜과 잉크는 은행 안 그 어디에도 없었고 그 자리를 하얀색 몸통에 까만색 머리 색깔을 한 100원짜리 모나 x볼펜이 바쁘게 움직이며 다녔고 선배들은 볼펜이 흘린 똥을 종이로 닦고 그 볼펜으로 다시 글씨를 썼다.


대인들은 하지 않는다는 휘갈기는 글씨를 선배들은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선배직원들 누구도 소인배로 보이지 않았다.


깨끗하고 정갈한 모습의 글씨는 애당초 찾아볼 수도 없었고 그렇게 글씨를 쓰게 할 시간적 여유를 객장 밖 고객들과 안에서 울려대는 전화기가 두지 않았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학문을 가까이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의 길을 꿈꾸어 왔고 나의 진로가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며 커왔다.

문학과 함께 살고 문학을 공부하다 책 속에서 죽기를 희망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우리 집은 가난하였다.

나를 양자 보낸 생가도 가난하였지만 나를 양자로 맞은 양가(養家)는 더 가난하였다.


내가 대학을 가겠다고 고집부리고 우기면 가엾은 내 양모(養母)의 허리가 휠 것이라는 것을 중학교 어느 때에 문득 깨달았고 나는 고등학교를 취업을 위한 상고(商高)로 선택하였다.


그때부터 나의 꿈은 내가 처한 가난이라는 현실과 정면충돌하였고 박살이 났다.


내 직성과 꿈은 인간의 내면적인 측면을 탐구하고 다양한 해석과 비판을 통해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문과(文科)였는데 내 현실은 숫자나 식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를 통해 정확성을 입증하는 이과(理科)였다.

나의 천성은 문학과 학문에 더 가까운데 나는 숫자와 영업이라는 현실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나는 천성적으로 숫자에 약했다.

국민학교 저학년 때 나는 문구점에 들러 공책이나 지우개, 연필을 사고는 거스럼돈을 문구점 주인이 주는 대로 받았다.

내가 더 많이 받았는지 적게 받았는지 그때는 알지 못하였다.


3학년 때 내가 외운 구구단도 내가 다른 아이들보다 숫자에 능해서 외은 것이 아니고 부회장은 반드시 외우라며 나에게 채근하신던 선생님의 손에 들린 회초리가 무서워서 억지로 외웠고 구구단에 장단을 넣어 노래로 외웠다.


그러나 8X7=56이 8이 7개 모이고 7이 8개 모이면 56이 된다는 뜻을 그때는 아예 몰랐다.


국민학교 때 산수라 불렸던 것이 중학교 때는 저 과목은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과목이라며 수학을 발끝 저 멀리에 두고 쳐다 보지조차 않았다.

무릇 수학이라는 것은 인간이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만 있으면 되고 더 이상이 그것은 자신의 뇌를 혹사시키는 것이라 혼자 결정 내리고 혼자 그렇게 믿었다.


100원짜리 물건을 사고 1,000원 지폐를 주었을 때 900원의 거스럼돈만 받을 줄 되었지 더 이상은 지식에 대한 낭비라 여겼다.

9라는 숫자가 9개가 모이면 81이라는 숫자가 된다는 정도만 알면 되었지 더 이상의 지식은 자신의 지식을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때 나는 나의 이런 생각들이 편협되었고 이과(理科)의 섭리에 미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격지심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모른 척하고 안 그런 척하며 살았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나와 수학은 심하게 다툰 연인들처럼 점점 멀어져 가더니 종국의 나는 수학을 일찌감치 포기하였고 그런 나에게 수학은 고등학교 3년 내내 치른 시험에서 단 1점도 내어주지 않았다.


수학선생님의 시험 출제 방식은 주관식 5문제를 내고 그 문제의 답을 구하는 과정을 쓰고 끝에 정답을 쓰는 방식이었다.

1문 제당 20점의 점수를 배당하셨다.


나의 수학시험은 늘 0점이었고 성적발표가 있던 날 수학선생님은 그런 나를 당신의 시간이 되었을 때 꽤나 굵은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리셨다.

내 기억으로 선생님은 60점을 맞은 친구는 4대, 70점은 3대, 80점은 2대를 엉덩이에 매를 치셨다.

90점과 100점을 맞은 친구들에게는 칭찬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다.


한 교실에서 매를 맞고 칭찬을 듣는 그 시간

나는 늘 이방인처럼 교실이 낯설었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내 자리가 어색하였다.


0점은 받은 나는 늘 6대를 맞아주는데 나는 맞은 엉덩이가 아프다는 생각보다 EQ보다 IQ지수가 낮은 나의 타고난 천성을 가지고 왜 나를 때리실까 하는 반항의 마음이 더 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거의 끝날 때 쯤

매번 시험 때마다 엉덩이맞는 나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는지 내 앞자리 형철이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형철은 내가 매를 맞고 난 다음 늘 선생님께 칭찬을 들었고 매를 맞은 우리한테 선생님이 그러셨다.

"느그는 형철이 쫌 닮아라.

특히 종열이는 형철이 반만 닮았으면 50점은 맞을꺼 아이가?"


나는 그런 형철이 부럽기도 하였고 살짝은 얄밉기도 하였다.


그런 형철이 그랬다.

자신은 수학시험에 자신이 있으니 얼른 문제를 풀고 답안지를 옆으로 빼줄 테니까 나더러 눈치껏 보고 베끼라라고 하였다.

즉 눈치껏 커닝을 하라는 말이었다.


순간 나는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듯, 죽은 님이 다시 살아 돌아온 듯 기뻤고 내가 가지고 있었던 살짝 얄미워했던 마음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시력은 거의 2.0에 가까웠다.

그런 나를 보고 친구들은 조상님이 혹시 몽골인이냐고 놀렸다.

옆으로 빼주는 시험지를 베끼는 일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시험 당일~

나는 나에게 닥친 현실을 어쩌면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친구 형철이 옆구리 옆으로 살짝 빼준 답안지가 시력 좋은 내 눈에 한꺼번에 들어왔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그러나 나는 그때 알았다.

커닝도 그 과목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기초실력이 있을 때 할 수 있다는 것을.......


형철이 내게 보여준 답안지에는 길게 답을 구하는 과정이 쓰여 있었는데 거기에 보이는 수학의 부호들을 나는 하나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루트와 시그마의 공식을 그때 나는 처음 보았는데 쓰는 것은 물론 그릴 수 조차 없었다.


화성인의 글씨를 지구인이 해석하는 것인들 이것보다야 어려우랴.


그때 나는 뒷자리에서 친구 형철에게 이제 그만 답안지를 넣으라고 손짓하였다.

친구 형철이 써놓은 답안지에 내 눈에 보이는 외계인 글씨로 보이는 수학의 부호들을 시험감독관 선생님 몰래 스케치하듯 그리는 것보다 차라리 시험이 끝나고 엉덩이를 쭉 빼고 눈 한번 질끈 감는 것이 훨씬 편하겠다는 생각에서 그랬다.


2년 동안 내 엉덩이를 때리셨던 수학선생님은 내가 3학년이 되자 이제 나를 포기하셨고 대신 내 명찰에 쓰여 있는 '이종열'이라는 이름 대신 나를 부르실 때 '어이, 빵점'이라고 하셨고 그런 선생님의 부름에 나는 "네"하며 대답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은행원은 하루종일 숫자와 생활을 해야 했고 하루의 시작과 마감을 숫자로 하였다.

하루에 입금된 예금을 잔액이 아닌 평균잔액을 계산해야 했고 한 달 영업의 목표도 일별, 월별, 분기별, 반기별로 구해야 하는 등 나의 머리는 온통 지금껏 내가 겪어보지 못하였던 생소함으로 가득 찼다.

어떤 때는 차라리 이렇게 머리 아프느니 엉덩이 6대를 맞는 편이 훨씬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은행생활이 점점 길어질수록 나는 스스로 나의 숫자머리에 대한 한계에 봉착하였고 그때마다 나는 문과체질인 내가 어쩌다 이과로 와서 이 고생을 할까 하는 자괴감에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초임책임자로 근무 한 안성지점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그때 나는 온라인책임자(지금의 팀장)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온라인책임자는 지점의 예금업무를 책임지고 있어야 했다.


그때 그 지점은 매주 월요일저녁 업무를 마치고 책임자회의를 하였는데 지점장님이 느닷없이 나에게 물으셨다.

"이대리!

우리 지점 예금계수가 대략 얼마쯤 되지?"

예금계수는 고객님들이 예금해 놓은 예금액수를 말하는 것이었다.


지점장님은 정확히는 몰라도 괜찮다는 의미로 질문에 '대략 얼마쯤'이라는 단어를 쓰셨다.

그때 안성지점의 예금잔액은 대략 1,200억 원 정도였다.

1,200억?

120억?

12억 원 인가?


순간 나는 사람의 머릿속에 수십, 수백 장의 백지가 들어갈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비슷하게라도 생각을 해내야 한다는 내 마음은 조급증만 더 들게 하였고 백지의 장수만 늘어가게 만들었다.

내 머리는 점점 더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책임자 생활을 어느 정도 하였으면 자기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고 조금 있다가 일아보고 보고 드리겠다고 상황을 넘기면 되었을 것을 군기가 바짝 든 초임책임자였던 나는 그런 융통을 부릴 머리조차 없었다.

당황해하는 내 모습을 보신 지점장님이 회의 끝나고 알아서 따로 보고해 달라고 그 사태(?)를 스스로 수습해 주셨다.


은행에서의 숫자 miss는 학창 시절처럼 엉덩이 몇 대를 회초리로 맞고

다른 친구들이 다 듣는데서 '어이 빵점'이라고 놀림을 받고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자칫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고, 직원들이 열심히 일한 1년 농사를 다 망칠 위험도 있었다.

예를 들어 12,000(단위 백만 원)이라고 써놓은 120억 원을 12,000(단위 천 원) 1,200만 원으로 잘못 읽고 업무를 진행한다면 엄청난 오류가 발생할 것이고 이내 그 오류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숫자에 대한 개념이 다른 사람들 보다 뒤처진 내가 매 순간 일어나는 숫자를 긴장해서 접해야 하는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입행하고 5~6년쯤 되었을 때 대학을 막 졸업한 나와 성향이 비슷한 내 친구가 은행을 직장으로 선택을 할까 나에게 자문을 구했을 때 나는 도시락을 싸서 그 친구에게 은행입행을 만류하였다.


그런데 은행원 생활이 1년, 2년 나이테를 더 해갈수록 나는 나 자신에게 깜짝 놀라고 있었다.

궁하면 통하였다.

어차피 내가 택한 직업이 은행이고 그 은행은 필연적으로 숫자와 함께 할 수밖에 없으니 내가 이 현실에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숫자에 대한 연구를 하고 독학으로 깨우쳤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불치하문(不恥下問) 아래를 가리지 않고 묻고 파고들었다.


희한하게 단 1도 없을 것처럼 느껴졌던 내 숫자머리에 숫자가 하나씩 채워지고 숫자가 채워진 만큼 머릿속 백지의 수는 줄어들었다.


 번의 책임자회의에서 지점장님이 물으신 예금계수에 대하여 명확하고 또렷한 음성으로 대답하였다.

"예

지점장님!

우리 지점 예금계수는 1천2백5십4억 9천만 원입니다.

지점장님!

우리 지점 예금계수 분기별 평잔액은 1천3백7십6억 2천만 원입니다."


이제는 숫자가 더 이상 숫자가 두렵지 않다.

숫자 바보였던 내가 한동안은 친구들 모임 총무를 여러 개 하였고 지금도 수십억 재산의 문중총무를 맡고 있다.


내가 만든 총무보고서를 본 문중어른들이 말씀하셨다.


"그래

은행원이 만든 보고서는 뭐 하나 나무할 데가 없구먼.

보고서가 이 정도는 되야지."


나는 속으로 말한다.

"어르신!

사실 저는 숫자 바보였고 숫자 문외한이었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지금껏 내가 35년간 접해 온 숫자 어디에도 나의 엉덩이를 어지간히 괴롭혔던 루트와 시그마의 부호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졸업한 지 40년이 훨씬 넘은 지금 고등학교 선생님들 중에 나에게 글씨의 중요성을 말씀해 주신 담임선생님과 내 엉덩이를 때리고 나를 부르실 때 '어이 빵점'하셨던 수학선생님 기억이 가장 뚜렷이 나고 가장 그립고 뵙고 싶다.


퇴직한 지금 나는 문과인(文科人)으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주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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