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ear Luna Jun 11. 2024

바라나시에서

 화장터에서 울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화장터 주변엔 이발소가 있고, 음식점이 있고 상점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누구도 망자를 애도하지 않았고, 이발을 하고 담소를 나누고 음식을 먹고 물건을 사고팔며 가끔 웃기도 했다.


 시신을 반듯하게 눕힌 모양 그대로 큰 천에 싸서 들것에 실은 채 4명의 남자가 함께 어깨에 받쳐 들고 걸어간다. 팔다리의 윤곽이 드러나는 모습 그대로의 시신을 화장터 근처 강가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들이 신성하다고 믿는 강물에 시신을 푹 밀어 넣더니 곧 꺼낸다. 그리곤 햇볕에 잠시 그대로 둔다. 화장터에서 태우기 전에 물기를 말리는 것 같았다. 물에 젖은 시신은 조금 전보다 더 늘어져 무거워 보였다.

그들은 시신을 옆에 두고 태평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강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어떤 이는 시신을 지키지 않고 자리를 뜨기도 했다.


 새벽에, 햇볕 뜨거운 한낮에, 저녁과 새까만 밤에, 화장터에 가 보았다. 화장터는 늘 장작이 타고 있어 연기로 자욱했고 매캐한 냄새가 지독하게 풍겼다. 생명을 잃고 굳어버린 피와 피부가 장작과 함께 타는 냄새는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의 피부에 와서 닿았고, 코로 들어와 폐까지 침투했다. 울렁증이 일어났고 두통이 밀려왔다. 나는 그 타는 냄새에서 인간의 습기를 기묘하게 느꼈다. 축축하게 달라붙을 것 같은 물기가 연기 속에서 함께 타오르는 듯했다. 그 습한 기운은 죽어버린 몸이 불 위에 올라 재가 되기 전 갠지스강에 마지막으로 몸을 적셨을 때, 영혼이 머금은 신성한 물이었을까.


 시신이 불에 타는 것을 애절하게 바라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결같이 담담한 표정으로 달을 보듯, 강을 보듯 타오르는 불길을 볼 뿐이었다.

삶은 고뇌이기 때문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빈다고 했다. 그것이 갠지스 강가에서 눈을 감고 합장하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소원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밀려오는 먹먹한 마음은 그들의 표정을 다시 보게 했다. 웃을 때 묘한 슬픔이 느껴지는 것은 그런 이유였을까. 활짝 웃지도, 슬퍼하지도 잘 울지도 않는다. 평온하고 잔잔하고 서두르지 않는 느긋한 여유로움은 다시 태어나지 않을 삶을 그래도 살아 나가야 한다는 의무감과, 이 생이 끝나면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그들에게 죽음은, 지난한 삶을 그만 접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먼 곳으로 떠나는 아름다운 여행인가 보다. 이렇게 떠날 수 있어 다행이라고, 그동안 살아내느라 고생했다고, 가는 걸음걸음 신의 축복이 가득하라고, 갠지스강의 신이 당신을 돌볼 것이라고 기도하는가 보다. 그리고 나도 곧 갈 것이라고.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바라나시의 화장터에서 죽음을 볼 수 없었다. 인간의 유한한 삶이 이어지고 되풀이되고 있을 뿐,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 슬픔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삶과 죽음을 만나보고 싶어 떠나왔는데, 돌아오는 길엔 삶으로 충만했다. 긴 여행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No problem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