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전말

나는 어쩌다 결혼을 하게 되었나. 하.

by 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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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하게 기억난다.

흠모하던 일간지 기자가 부탁한 케이블 방송 땜빵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날도 어버버 하다 끝난 방송을 곱씹으며

다시는 이런 (깜냥도 안 되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얼굴 팔리고, 돈도 안되고, 밑천도 드러난다.

가지 말아야 할 길 초입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저 oo누나가 번호 알려줘서 전화했는데요."

소개팅하기로 했던 남자였다.


그가 말한 oo누나는 정선에 사는 선배였다.

선배는 서른이 넘도록 남자친구 하나 없는 나를 어여삐 여겼다.

"문어야, 나쁜 남자 소개해줄 테니까,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라."

감사한 선배님이시여. 왜 제게 AS 금지라고 하신지 이제는 압니다.

그게 끝이었다. 내게 허락된 정보는 그가 서른아홉 먹은 (음악을 만드는) 나쁜 남자, 라는 것뿐이었다.

그건 그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 사람은 내가 32살 여자라는 것 밖에 모르는 듯했다.


"제가 오늘 oo 누나 만나러 정선에 가거든요. 다녀와서 금요일에 보면 좋겠는데."

"아, 제가 이번 금요일은 출장이라 정선에 갑니다."

"출장이요? 무슨 일 하세요?"

"아, 저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일을 합니다."

"기자구나, 음... 그럼 다녀와서 연락 주세요."


그가 정선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날, 나는 서울에서 정선으로 향했다.

이건 보름 뒤쯤, 공항에서도 반복되었는데

(내가 이스탄불로 출발하는 날, 그는 코사무이에서 돌아왔으니까)

이제와 생각해보니, 하늘은 꾸준히 내게 시그널을 준 것도 같다.

도망가,


어영부영 시간이 흘렀다.

주말(것도 일요일) 오후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만나자"는 느닷없는 번개(?)로 소개팅을 하려는 그 남자에게 (이제는) 기대도 흥미도 사라진 나는 한 번은 만나야 끝이 낼 것 같은 소개팅을 마무리하기 위해 냉장고 바지를 입고 앞머리의 기름기를 실핀으로 밀어버린 채 광화문으로 출동했다.

종각역에서 내려 슬슬 걸어가려던 계획은 난데없는 소나기로 구겨졌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애매한 비와 함께 느려지는 걸음을 잡아끌어 씨네큐브에 도착했다.


산적 같은 대(갈)장(군) 남자가 혼자 아아를 마시고 있었다.

가서 "oo선배 소개팅?"으로 신상만 확인하고 바로 커피를 주문하러 갔다.

뒤에서 "제가 사...."라고 들렸나 안 들렸나.


이건 사족인데, 나는 소개팅 상대가 마음에 들면 그 사람이 커피를 사도 가만히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는 만나지 않을 생각이라면 내가 마신 건 내가 계산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암튼 씨네큐브 안의 그 커피집에서도 커피는 내가 사서 마셨다. 목이 탔다.


그가 예매한 영화는 <마지막 4중주> 였다.

살면서 가능하면 열어보고 싶지 않은 화장끼는 커녕 수분끼도 없는 인생의 민낯 같은.... 술을 부르는 영화.

자유로운 시절, 나는 마음이 무거운 일이 있을 때 우울한 영화를 보곤 했다. 그럼 지금 내 앞의 고민은 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지금 이 소개팅이 고민이라고 해도 만난 지 10분 된 남자랑 나누기에는 과했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 나오니 밖은 어두워졌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개팅 남은 "집이 어디냐"며 "데려다주겠다"라고 했다.

아니 아니 됐거든.

집 앞에서 순댓국에 소주 한 병 마시고 들어가 일요일을 마무리하고 싶거든.


커피도 얻어먹기 싫은 남자 차를 탈리가 있나, 싶었지만

차에 탔다. 산적 같았지만, 말이 별로 없었고, 선배 말처럼 나쁜 놈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기보다

비가 내렸고, 길거리는 이미 어두워졌고, 영화의 잔상은 떨어지지 않았고

소개팅 남이 "술 땡기는 영화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집 근처 선술집에서 도쿠리(?)까지 사이좋게 나눠마시고

소개팅남은 대리를 불러 혼자 갔고,

나는 택시를 타고 혼자 돌아왔다.


소개팅 한 남자랑 영화를 본 것도 처음,

소개팅 한 남자 차를 타본 것도 처음,

소개팅 한 남자랑 술을 마셔본 것도 처음이었다.


친구들은 내 소개팅 얘기를 듣고선 모두들 입을 모아

"야, 그 남자가 너 진짜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며 종알거렸다.

재미없는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고, 집에 데려다주지도 않은 것을 그 이유로 들었다.

어쩌면 친구들 말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지금 옆에서 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그말은 순도 100% 진실이었네.

IMG_8203.JPG 아프냐? 나도 아프다


아, 소개팅 남이여, 그대도 식솔들 먹여살리느라 박이 터지겠지만

하루종일 밥하고 똥치우며 너네들 딱가리하는 나도 쌍코피 터진다.



네명이 각방 쓰는 그날까지. 각방시대여, 어서 오라!

내 방은 자물쇠를 채워둘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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