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 살을 빼고 머리를 길렀다. 수술도 했다. 그래도 안생겼다.
좌절감과 패배감에 발버둥치던 스무살,
꽃다운 나이를 80kg에서 시작했다.
이십대 초중반 역시 비슷한 몸무게를 유지했다.
사진기자로 잡지사에 취직하고 클라이밍을 해야 한다고 등산학교에 가게 되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무게로는 밀리지 않던 스물 대여섯의 나.
(빌레이 봐주던 등산학교 선생님들께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다.)
트레킹도 바위도 더럽게 못했지만, 하산주 먹는 재미에 모든 걸 이겨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북한산 도선사에서 깔딱고개까지 가는 것도 너무너무 힘들었다.
등산학교는 총 6주 과정이었는데, 신기하게 점점 나아졌고, 6주차쯤에는 걷기 정도는 거뜬해졌다.
등산학교를 졸업하던 날,
선생님들이 내 두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다.
"한 가지만 약속해 줘. 빙벽반은 오면 안된다."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등산학교 덕분인지 매달 있던 산행 덕분인지
잡지사를 나올 즈음에는 57kg의
생애 다시 없을 몸무게가 되었다.
날렵해진 몸매로(?) 이직을 했건만 남자는 생기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눈 두개, 코 하나, 콧구멍 두개, 입술 하나, 귀 두개.
예쁘다 안 예쁘다를 떠나서 여자인 내게 좋다고 하는 남자가 없었다.
그래서 머리를 길렀다.
단발 강을 건너 어깨 늪을 지나 팔꿈치 좀 못 미칠만큼 머리를 길렀다.
서른살, 170 넘는 키에 57kg, 거기에 성별을 분명히 해줄 기나긴 머리카락까지 장착했으니
이제 남자가 생기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맞다. 시간문제. 근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안생겼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는 포만감과
쥐꼬리만한 월급이라도 내가 벌어서 나를 책임진다는 뿌듯(?)함 속에서도
문득문득 고민이 되었다.
왜. 나는 남자가 안 생기는 건가?
살도 뺐고
머리도 길렀다.
심지어 코도 세웠다. (성형수술 맞다. 등산학교에서 찍힌 사진 중 바위에 네발로 붙어 오들오들 떠는 사진을 본 아부지는 "야, 이러다 콧구멍에 비 들어가겠다"라며 직접 동행하여 성형외과에 데려가셨다. 내 동생은 언니는 성형인이라고 했다.)
성형인이 된 나는
아무튼 화장도 하고 치마도 입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두번째 회사는 무교동에 있었는데,
휴가도 안쓰고 출장만 다니고 마감만 하는 나를 어여삐 여겼는지
모두가 소개팅을 주선해주곤했다.
심지어 어떤 실장님은 이력서를 갖고 오라고 하셔서 나를 설레게했다.
좋은 곳에 취직시켜주는 줄 알고 깨방정 떨었는데, 선자리였다.
무려 10살이 많은 무척이나 잘난 남자를 소개시켜주셨는데,
소개팅으로 쫑. 그 자리에 카메라 가방 들쳐업고 간 내가 참.... 예의없는 여자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암튼,
한 두세달 정도 점심시간은 소개팅 스케쥴로 만땅이었다.
(확 몰릴때, 성수기 시즌이 있었다)
대부분은 소개팅 상대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중국 공산당'을 소개시켜 준다던 양반의 얼굴과(이름은 까먹었다)
딱 하루 소개팅날 만났지만 일주일은 앓게 만든 오빠(?)가 기억난다.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최고라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공산당 남자는 만나지 못했지만,
그때의 충격과 공포는. 하하하
일주일을 앓게 만든 오빠는 대대로 청담동에서 나고 자란 부잣집 아들이라고 했다.
찻집에 들어가자 민머리 아저씨와 이 오빠가 앉아 있었는데,
이 오빠가 그 오빠라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새 구두를 신고 발이 아파서 쩔쩔 매는 내게 운동화를 사러가자고
다음에는 만나서 뭘 하자고 한시간 내내 뻐꾸기를 날리던 남자는
헤어지고 나서 문자가 없었다.
처음 만나 차 한잔 마셨는데, 나는 이 남자랑 데이트 할 생각에
눈알이 빠지게 연락만 기다리다, 먼저 문자를 보냈었드랬다.
처음 소개팅 자리가 끝이었다. 일주일동안 마음 고생(?) 한게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그때는 애간장을 끓였다.
암튼 그때 한가지 사실은 알았다.
남자는 관심있는 여자에게는 연락을 한다는 사실을.
상중, 병중, 아웃오브안중--- 이 경우가 아니면 연락한다는 사실을!
점시시간의 소개팅은 좋은 점이 제법 많았다.
일단 가볍게 차를 마시며 상대를 첫 대면 할 수 있다.
점심시간은 직장인들의 공식적인 밥 시간이지만,
점심시간에 소개팅을 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차를 마셨다.
이야기가 잘 통하고 마음에 맞으면 다음에 만나면 되니까.
서로 부담없이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은 좋았지만
첫인상에 나가리면 그걸 땜빵할 기회 같은 건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무교동에서의 봄날은 지나갔다.
그때 ... 소개팅 주선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