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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희 Aug 31. 2024

[에세이] 사랑, 사랑, 사랑.

챗 지피티가 이 글을 읽고 만든 이미지


    사랑, 입안에서 사각거리며 혀가 굴려지는 순간까지도 달콤하다. 처음 사랑에 대한 글을 쓰겠다 생각했을 때 별 이유가 없었다. 왜인지 써야 할 글, 쓰지 않으면 안 될 글 같았다. 왜일까. 사랑, 사랑, 사랑. 이미 이 세상엔 사랑을 부르짖는 사람이 너무 많다. 사랑이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그런 대승적 의미의 사랑뿐만이 아니라, 일상을 공유하는 사사로운 차원의 사랑마저도, 거리를 울리는 대중가요의 단골 소재가 된지는 오래다. 어쩌면 사랑을 소재로 한 어떠한 것도 더 이상 소재로서의 흥미를 끌기는 어려울 수 있겠다. 사랑이 지겹다는 말마저도 더 이상 신선한 취급을 받기 어려운 실상이니 말이다. 


    사랑은 ‘잘 팔린다’. 이는 지겹다고 말하는 것까지도 지겨워질 정도로 더없이 만연하고 이해받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을 정도로 진입장벽이 낮지만 동시에 매우 개인적인 양상을 지닌, 이 양가성이 사랑을 소재로서 연명케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여느 감정과 달리 이 감정의 시작은 그야말로 느닷없다. 모든 감정이 촉발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사랑은 그 근원을 찾아보기 어려울뿐더러 민망한 데가 있다. 깊은 구석 어딘가에 그 이유가 존재할 테지만 구태여 짐작하고 싶지 않고 묻어둔다. 그 지점은 나의 연약한 지점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내가 마치 사랑이 별것도 아니라는 듯 담백하게 쓰려 애를 쓰고 있지만 사랑은 이런 나조차도 매료시켜 안달 나게 만들 수 있다. 의연하게 사랑에 목매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그 어느 누군가도 청승맞고 미련하게 만들 것이다. 이 강력함 앞에서 조용히 납작 엎드려 인정한다는 것은 지는 것 같아서일까. 사랑을 언급할 때면 더없이 꼿꼿해지고 싶다. 지지 않겠노라고. 내가 너를 정확히 적어내리고 말 거라고. 지금 사랑을 다루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사랑타령이 민망해져 이 투지마저도 사라질 테니 말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와 ‘나의 해방일지'를 쓴 박해영 작가의 강연에서, 나는 어떤 경험을 하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지 질문하였다. 그녀는 사람들은 자신의 글을 보고 연애를 많이 해본 줄 알지만 아니라고 답했다. 어떤 사람은 단 몇 번의 사랑만으로도 사랑을 아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많은' 경험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면서 말이다. 많진 않지만 강렬했던 내 사랑 앓이도 그랬다. 다 내어주고 싶을 정도로 좋아해 보기도 했고,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어렵기도 했으며,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역겹기도 했다. 그들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제각기 달랐다. 얼굴이 잘생겨서, 웃는 모습이 예뻐서, 대화가 재밌어서. 그 시발점에 도무지 통일성이라곤 없다. 제각기 다른 그들을 하나하나 참으로 열렬히도 좋아했다, 바보같이. 정말 바보였다. 언제 어디서도 그 사람만 생각나고 그 사람만 보였다. 그게 원통한데 또 좋으니까 녹아내렸다. 그런 게 사랑이었던 것 같다. 


    K와의 사랑도 다르지 않았다. 나보다 일이 능숙해서, 미래에 대한 진취적인 면모가 좋아서, 나의 일을 도  와줘서? 정의 내리기 어려워도 이 모든 면을 사랑한 것은 맞다. 그를 만나며 내 손이 항상 따뜻하다는 것을 알았고, 항상 무표정한 사람이 그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사람이 미안해지면 담배를 연거푸 피워낸다는 것도 알았고, 자존심 센 사람의 미안하다는 한 마디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았다. 그는 어떤 면은 지독히도 미숙해서 도움을 필요로 했고 나 또한 그러해 우리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듬을 수 있었다. 그 과정을 함께하는 것이 좋았고, 우린 좋은 연인이 되기 이전에 좋은 파트너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좋은 사람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우울을 앞세워 나를 밀어냈고 그러면서도 내가 다가오길 바라는 그런 사람이었다. 모질게 굴면서 또 자신을 가까이하길 바라는 그 마음이 너무나도 치사해 멀어지기로 결심했다. 나는 그에게 좋아했’었’다고 말했다. 그때도 좋아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좋아하고 있었지만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 자존심이었고, 답은 예상대로 거절이었다. 우리는 어색한 친구 사이로 몇 개월을 보냈고, 감정이 남아있지 않은 지금은 가끔 안부를 묻고 가끔 왜 좋아했었지를 불쾌해하는 그런 정도가 됐다.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나서부터 줄곧, 이토록 낯간지럽고 개인적이기 짝이 없는 이 이야기가 왜 그토록 하고 싶었는지 알 수 없었다. 뭐가 자랑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세기의 사랑을 했던 것도 아니고 결국엔 잘 만나고 있다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게. 사랑이 뭐길래. 그렇게들 떠들어대는 걸까. 나는 언제고 왜 이 이야기를 기어코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걸까. 어떤 시점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사랑이란 존재가 더 이상 신비롭지 않아진 데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 자체로 흥미가 떨어져서 일 수도 있지만, 내가 감히 사랑의 정체를 알게 되어서일 수도 있다. 


    사랑은 짜릿함, 설렘과 함께 아픔과 생채기를 남기기도 한다. 나를 이루고 동시에 나를 파괴한다. 담장을 허물고 깊숙이 그 사람의 흔적을 남기고는, 시간이 지나 지우기도 하고 다시 그리기도 한다. 사랑은 나의 일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나를 완전히 개간해버릴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이것은 신기하게도 사랑 외에는 대체할 수 없다. 온통 통제 불가능한 변수 속에서 나보다도 나를 위하고 싶은 사람이 생긴다는 것, 이리 바보 같은 행동을 단번에 납득하게 하는 그것. 나는 이것이 사람들이 사랑을 찾게 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힘이라고 본다. 


    새살이 돋아날 때는 자꾸 그 상처 주변을 만지게 된다. 만져서 아프지 않을 정도가 됐을 때쯤엔 괜스레 가렵고 어떻게 새살이 돋아났을까 궁금하다. 아마도 그런 시기가 온 것 같다. 지난 사랑을 괜히 회고해 보며 살펴보게 되는 시기. 이 말은 즉 어쩌면 마음속으로는 준비가 되었다는 뜻과도 같다. 사랑을 할 준비 말이다. 이걸 깨닫고 나서부터는 어떤 사람이든 사랑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괜스레 웃음이 났다. 아 이 사람 사랑하고 싶구나. 사랑할 준비를 잔뜩 하고 있구나. 그래, 이다지도 강력한 사랑을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사랑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보면 이렇게 생각해도 좋을 듯하다. 그들은 사랑에게 낮게 속삭이는 것이다. 어서 오렴, 사랑, 사랑,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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