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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희 Jun 13. 2024

[에세이] 사랑도 취사선택이 되나요?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사랑도 취사선택이 되나요?> 

단발머리에 크고 동그란 눈, 매끈한 피부와 얇고 곧은 몸, 회색 목도리와 얇은 군청색 패딩을 입고 있던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언니의 첫 모습이다. 언니는 나와 작년 영화과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났다. 영화 만들기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람이 고파서 영화과를 갔던 내가 처음으로 말을 건 사람이 언니였다. 수줍은 인사로 시작된 대화에서 느낄 수 있었다. 언니는 그토록 내가 꿈꿔왔던 환상 같았다.

나는 이상적인 친구의 조건 같은 것을 만들고 염불을 외듯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었다. 그 조건이 생성되기까지는 지난한 외로움을 필요로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나의 별명은 ‘부담임'이었다. 학부모 모임을 나간 엄마가 같은 반 엄마들로부터 알게 된 별명이었다. 아마도 생각이 많은 것, 모든 것에 이유를 찾았던 성격이 그리 비추어졌지 않았을까. 어릴 적부터 감상적이고 생각이 많았던 나는 주변에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학교에서 매년 갱신되는 단짝 찾기의 과제는 실패의 역사 속에서 ‘올해는 다르겠지.’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좇아야 했다. 역사의 반복 속 이쯤 되니 내가 문제인가 싶어졌던 게 재작년이었다. 내가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인가 싶었다. 좌우지간 그런 친구를 알아보아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만든 조건이 아래의 조건이다.

‘나이는 나보다 좀 더 많을 것, 여자인 친구이며, 예술계 사람일 것.’

나보다 나이가 많아야 내가 가진 특유의 불안을 경험적 근거로 안심시켜줄 수 있을 것이고, 나의 어른스러움 또한 이해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서 살며 느끼는 동질감과 나의 사유를 좋아하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생각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어야 했다.

영화과에서 만난 7살이 많은 아라 언니는 완벽하게 그 조건에 부합했다. 어쩌면 내가 예지를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전히 충족했다. 22년간 언니를 만나기 위해 외로웠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언니는 언니가 가진 특유의 성숙함과 따뜻함으로 나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학교 합격이 발표되고 나서도 과호흡이 올 정도로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나는 영화과에 다니며 언니를 주축으로 많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빠르게 진정됐다. 이제 아라 언니를 소개할 때면, 세상에서 두 번째로 사랑하는 여자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언니가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던 작년과 달리 여유가 생긴 2학년이 되고, 언니는 우연한 계기로 좋은 분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연애가 성사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지켜봤고 이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연애를 하기 시작한 언니는 반짝반짝 빛이 났고 생기가 나는 듯했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우리가 연락하는 빈도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와 언니 모두 연락을 빨리 잘 답했기에 이전과의 차이는 더 크게 느껴졌다.

공허감이 드는 일상이었다. 어디서 근원했는지를 찾다가 일상의 변화를 훑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언니가 큰 존재였음을 그때 알았던 것 같다. 처음으로 언니를 생각하면 속이 쓰렸다. 내가 원하는 것을 왜 주지 않냐고 떼쓰는 어린아이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막상 옆구리가 시큰하니 서운함이 밀려 들어왔다. 언니에게 투정을 부려보기도 했다. 나랑도 만나달라고, 나랑도 놀아달라고. 언니는 웃으며 자신의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때 나는 더는 요구할 수 없음을 알았다. 비혼이었던 언니는 지금 만나는 남자친구분과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관계에 진지했다. 더군다나 연애 초기인데 또 얼마나 더 만나고 싶을지 이해가 가기도 했다. 뭐가 됐든 언니는 나에게 전처럼 시간을 쓰기는 어려웠다.


“준희 씨는 관계에서 서운함을 잘 느끼시는 편이군요.” 매주 한 번씩 받고 있는 학교상담에서 이 이야기를 하자, 상담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사전적 정의로는 마음에 모자라 아쉽거나 섭섭한 느낌. 서운함은 즉, 내가 준 것보다 받은 것이 적다고 생각될 때 느끼는 감정이다. 불충족에서 오는 불쾌였다. 나는 상담 선생님의 말씀을 쉽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주는 것과 받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마음을 쉽게 주고 선물이나 선의를 쉽게 베푸는 편이었지만 돌아오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서러웠기 때문이다. 아예 주지도 말아야 하는 것인지, 만족할 줄 아는 방법을 알아야 하는 것이 고민이었던 때였다. 그때 우연히 ‘되돌려 받기 위한 친절은 그만둘까 봐’라는 노래 가사를 보게 되었다. 심장이 덜컥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래, 생각해 보니 내 친절은 대가가 있었다. 그들이 내가 베푼 친절에 대해서 다시 그만큼을 돌려주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저 나는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받았을 뿐이다.
사람은 사람들 속에 살아간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작은 호의도 친절도 없는 퍽퍽한 세상 속에 불가능한 각자도생을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 연인이라는 이름표의 인연을 맺으며 사랑을 나눈다. 그때 우리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할까. 아니 애초에 그럴 수 있을까. 솔직히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해봤기 때문에 안다. 그토록 사랑하기를 힘썼던 나는 한 번도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 친구의 조건을 만들게 된 것이 그 방증이다.

나는 애써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갇혀, 사랑하기 어려운 상대를 힘들어하고 엉뚱한 곳에 힘을 빼고 있었다. 사람은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해 줄 이유도 없다. 내가 받을 수 있고 바랄 수 있을 만큼만 좋아하고 힘을 써야 하는 것을 몰랐다. 모든 면을 사랑할 필요 없이 내가 좋아하는 구석을 열렬히 좋아하고, 아쉬운 구석은 그저 알아두고 아쉬울 상황을 덜 만드는 것이 맞았다. 우리는 사람도, 애정도 대체될 수 없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둘도 없는 연인이 헤어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사실 이는 쉽게 대체된다. 그저 대체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 또한 그 사람에게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오고 감에는 뜻이 없다는 말이 있다. 결국 내가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인간관계에 신물이 났던 나는 사람을 미꾸라지에 비유했다. 사람은 시끄럽게 물장구를 치면 오지 않고, 마치 그냥 나는 별생각 없이 무심하게 손을 내밀고 있으면 슬그머니 찾아오는 것이라고. 사람은 나로 인해 변하는 것이 아닌 각자만의 맥락과 상황으로 내적인 변화가 이끌어진다. 나 역시 그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각자의 높낮이가 잘 맞아떨어지는 때에 우리는 사랑하게 된다. 아라 언니는 내가 언제까지나 좋아할 친구겠지만 내가 해야 하는 건 언니와 함께하는 좋은 시간만 가져가는 것이다. 조금 줄어든 연락의 빈도도, 시간도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있다. 언니와 함께 하는 순간을 즐기며 좋은 시간을 유도하고, 필요하다면 부족한 애정은 다른 곳으로부터 채우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에 연연하지 않는 성인군자는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씁쓸해지는 때가 있다. 그러나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애써 끌어안는 것보다, 내가 감당할 만큼을 알고 그만큼을 담을 수 있는 것이 더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닐까. 오늘도 나는 이렇게 사랑을 공부한다. 더 마음껏 사랑하려고, 또 사랑받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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