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AR에세이] 달콤쌉싸름한 이정표
스물하나에 대한 기록
또 한 해가 지난다. 유난히 올해에는 해를 넘기는 게 두렵고 아쉽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1년을 잘 버텨냈다는 보상으로 새 학년 혹은 새 학교라는 징표를 수여받았지만 코로나상황으로 제대로 학교도 다니지 않아서인지 어영부영 한 것도 없이, 나의 스물 하나를 보내는 느낌이다. 스물이라는 나이는 작년에 썼던 글처럼 허무 뿐이었을 지라도 그 허울은 존재했다. 명실상부 성인의 상징이고, 새로운 십의 자리가 열어주는 대단원의 시작이니까. 아직 처음이라서 익숙하지 않겠지 하며 관대한 시선이 용인되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까짓것 스물 하나를 받아들이는데 거침이 없었던 반면, 스물 둘은 스물 하나인 내게 왠지 이제는 면죄부 없이 어른의 무게를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아 부담스럽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나는 나의 손에 쥐여지는 고삐를 잡아야할 때가 온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들은 점차 얼굴에 훈장자국들이 늘어가고, 때로는 멀리 나를 떠나가기도 하면서 나는 정말 "제대로" 살아야 함을 느꼈다. 아름다운 말로 감추기 힘들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생각보다 세상은 내가 온실에 있었음을 자각케 했고, 남들과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그 각오 또한 있어야 했다. 첫 아르바이트는 보다 구체적으로 나의 무지를 보여주었다. 별거 아니게만 보였던 모든 것들은 정말 별거였음을, 이제는 나의 미숙함은 어린 나이로 포장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이다. 가뿐히 이룰 것만 같던 것들에 대한, 한 때는 의아했던 경외심은 이유가 있었다.
직감적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붙잡아야 할 것들은 챙기고, 버려야 할 것들은 어서 털어내야 함을 깨달았다. 부족함을 직면하는 것은 언제나 무척 힘들고 벅찬 일이다. 누군가의 악의 없는 말로 혹은 눈 앞의 결과로서 보여지는 서툶에 부끄럽지만 압도되었었다. 생이 맡겨진 뒤로, 숱한 처음들을 맞이해왔으나 단지 20년의 삶을 근거로 주어진 자격은 그 처음의 결을 바꾸어놓은 것만 같았다. 처음이라는 충분하고 합리적인 변명거리에도 왜인지 이 처음들은 불충분한 나 자신을 너무나 원망스럽고 못나보이게 했다. 하지만 나를 옥죄는 아픈 현실을 직시해야 했고, 그 인정과 수용이 나를 성장하게 하는 마음가짐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나이를 방패삼아 미숙함을 숨기는 것이 아닌, 앞으로 나가기 위한 발걸음에 책임을 지는 것. 모자람에 대한 직면은 훗날의 노련함을 위한 전구체임을 이제는 안다.
더 높은 도약을 위해서는 그에 맞게 긴 도움닫기가 필요한 법이다. 본디 참을성이 없는 나이지만 인고의 시간을 받아들여야할 것 같다.
문을 열었던 첫 걸음, 스물.
열었던 문 앞으로 나가기 시작한 스물 하나.
스물 하나는 옆에 붙은 "하나"가 제 역할을 했는지, 멋모르던 스물보다는 더욱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그 시작의 설렘을 담았던 (어쩌면 스물의 글과 닮은) 비유적인 이전에 써놓았던 글들보다도, 담백하게 표현한 이 글이 결국 더 와닿는 것을 보면, 나에게 스물 하나는 설렘과 동시에 씁쓸함도 컸던 것 같다. 달뜬 요란한 거품이 시간이 지나 설렘과 함께 녹아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순리이지만 이에 따른 아쉬움 또한 자연스러운 어리광일 것이다. 당장 보내주기 싫은 여운이지만 어느새 신발끈을 고쳐매고 있는 나를 보면 또 마냥 싫은 건 아닌 것도 같다.
21.11.17. 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