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Friday 3:13 _채채
사실 나는 ‘새해’라는 개념에 크게 연연치 않는 사람이었다. 매년 12월 31일엔 항상 집에 있었고 12시를 딱히 기다리지 않았으며 새해라고 등산을 한다거나 일출을 보러 떠난다거나 그 어떠한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 이날은 달랐다. 2021년 12월에 만난 모든 이에겐 “저 이제 서른이에요. 20대 마지막 만남이에요” 라며 거의 내 나이를 홍보하고 다녔고 (그들은 나의 나이를 궁금해하지 않음에 불구하고) 내가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땐 ‘음.. 30대엔 다른 선택을 하게 될까?’ 하면서 곧 서른 살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날을 기다렸다. 작년 한 해를 딱히 아홉수라 규정지어 탓하지 않았음에도 왜인지 더 나아질 것 같은 기대감, 코로나만 사라지면 일이 더 많아질 것 같은 프리랜서의 설렘, 아니면 그냥 ‘서른’이라는 글자가 주는 안정감이 좋았는지 모르겠다. 드디어 D-day,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오 이제 서른이야 나!” 하고 소리쳤는데, 웬걸? 그저 자고 일어나니 해가 바뀐 것 그게 전부인 채로 나는 서른이 되었다. 그리고 3주의 시간이 흐른 지금, 모든 것은 여전하다. 나는 어떤 마법 같은 일을 꿈꿨던 걸까? (오늘과 내일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 아니야. 분명 무언가는 바뀌었을 거야. 어떤 작은 것이라도 찾아보자.. 뭐가 있을까? 생각의 끝에서 나는 조금은 무책임하고 식상하지만 나름에 결론을 내려본다. 그냥.. ’ 나의 서른’은 이제 시작이니까 조금 더 꿈꾸며 살아봐도 괜찮지 않을까?
꼭 당장 변하지 않더라도 서른을 잘 살아낸 내가 결국은 찾게 되지 않을까?
연초에 나는 나에게 편지를 남긴다. 한 해 동안 내가 이룬 것, 생각한 것, 재밌게 본 영화, 많이 들은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 이야기 그리고 1년 후에 읽을 나를 위해서 작은 위로의 말들을 남겨놓는다. 스물한 살에 시작한 나만의 연례행사인데 서른을 맞이한 올해엔 지난 편지들을 모두 꺼내어 읽어보았다. 20대 초반엔 80%가 사람 이야기다. 거기서 또 80%는 남자 친구 이야기(지금은 잘 지내는지도 모를 인연이 그땐 그렇게 소중했다) 그리고 20대 중반에는 대학을 졸업한 후라 내 전공과 직업에 대한 걱정, 돈벌이에 대한 걱정, 20대 후반에는 새롭게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나에 대해서 고민한 일들이 잔뜩 쓰여있다. 나는 이 편지를 쓸 때마다 어쩌면 난 특별한 삶을 살고 있는지 몰라 또는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그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딱 그 나이에 맞는 평범한 삶이었다. “지나고 보니 별거 아니더라. 다 똑같더라” 진부하다 생각했던 말들을 인정하고 깨닫게 된 과정이랄까. 진부함이 정답, 변하지 않을 진리. 이런 문장을 내입으로 뱉게 되다니..
아.. 어쩌면 이것 또한 진부한 보통의 생각이며 생각을 하면 할수록 평범해지는 것 같지만 이렇게 뻔한 과정이 이처럼 즐겁고 행복한 거라면 앞으로 살아갈 평범한 내 인생은 또 얼마나 특별할까.
어쩌면 서른의 나에게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저 하루하루가 쌓여서 어쩌다 서른이 된 것인데.. 또 해가 바뀌어 나이가 든 것뿐인데 왜 이렇게 서른이라는 것에 의미부여를 하게 되는 걸까? 아마 은연중에 서른부터 진짜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는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라는 말은 듣지 않을 것 같은 나이, 이제는 정말 모든 선택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나이, 물론 20대에도 그랬다. 그렇지만 서른 살이 된다는 것은 성인이라는 딱지가 붙은 지 10년이 흐른 것이니 조금은 더 완전한 모습의 어른이 되어야 할 것 같은 또 다른 책임감이다. 20대에는 나만을 위해 살았다면 이제는 주변을 돌아보고 이 세상의 완전한 구성원으로서 어느 한 부분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책임감...
중학생 때 교회 집사님 중 한 분과 굉장히 가까이에 살았는데 그분은 항상 내게 무언가를 주셨다. 주방세제, 종이컵, 칫솔, 그리고 과일 같은 중학생에게 적합한 선물은 아니지만 꼭 필요한 것들을 나눠주셨다. 특별히 가지고 오시는 게 아니라 그저 장 보고 오는 길에 마주치면 그날 장바구니 속 물건들을 아무렇지 않게 나누어 주셨다. 그땐 마냥 많이 사는 걸 좋아하시는 분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당시 우리 집이 아버지의 사업부도로 인해 조금 힘들었던 것 같고 아마도 집사님은 그런 장바구니 나눔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나를 도와주고 싶었던 것 같다. 15년이 지나서야 그 마음을 알게 됐지만 이제라서 무심한 듯 베푼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관심이었는지 알 것 같다. 또한 그때 진짜 어른을 만나게 된 것에 감사하고 나 또한 그렇게 진짜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의 상황을 먼저 살피고 무엇이 필요할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 다른 사람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 그렇게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며 살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서른 살이 된 나에게 한번 더 기대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