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Friday 3:13_수수
매일같이 집 앞에 택배가 놓여있는 때가 있다. 일 년에 한두 번씩은 꼭 그렇게 ‘뭘 사고 싶다’는 생각이 미치게 드는데 집에 택배가 있는 날은 그 택배가 뭐든 간에 기분이 좋고, 없으면 허전하다. 엄청난 걸 사는 게 아니고 생각보다 시시한 택배가 많다. 예를 들면 치약, 양말, 로션 같은 별거 아닌 작은 것들 말이다. 근데 왜 기쁘냐 하면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저 포장지를 뜯고 새 물건을 들였다는 생각이 좋은 것 같다. 그리고 보통은 필요한 물건을 샀다는 만족감이 크다. 택배가 쭉 오다 하루 없는 날엔 허전하고, ‘뭐 살게 없나’ 두리번댄다.
그러다 이상한 구매를 하게 된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사지 않을 물건들이 하나둘 날아온다. 그런 물건이 집에 도착하는 날엔 물건을 보자마자 후회한다. 같이 사는 부모님이 뭘 샀냐고 물을까 마음 졸이고, 얼마 주고 샀냐고 물어보면 가격을 낮춰 말한다. 그런 물건은 어디 보이지 않게 처박아두게 된다. 이런 처박템엔 나에겐 어울리지 않을 색상과 무늬지만 가격은 비싼 옷, 내가 잘하지 않을 스타일의 액세서리, 혹은 내 방엔 어울리지 않거나 전혀 필요 없는 작은 가구나 소품 등 종류도 다양하다. 사자마자 잊고 싶은 물건들이라니, 이런 이상한 구매가 늘어날 때쯤 다행히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매일같이 집 앞에 택배가 놓여있을 때는 내가 정상이 아닐 때였다. 평소보다 훨씬 더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 뭔가 잘 안 풀리고 있을 때, 극도로 피곤할 때, 사람 관계가 어려울 때 등 수없이 다양한 ‘힘든 때’ 말이다. 나는 나의 힘듦을 알아채지 못하고 내 돈을 쓰는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건전하지 못한 방식이다. 힘듦의 근원 근처에 가지도 않고 임시방편적으로 그 시간을 지나가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힘들게 번 소중한 내 돈도 사라지고 말이다. 진짜로 소비가 나를 치유해줬는진 모르겠다. 그래도 항상 그런 기간은 쥐도 새도 모르게 또 조용히 지나가는 걸 보면 날 버티게 해 주긴 해줬던 것도 같다.
힘든 상황을 치유해줬는지 아닌진 모르겠지만, 내 충동적인 소비들로 그 물건 외에도 꽤나 많은 것들을 얻었다. 나한테 뭐가 안 어울리고 뭐가 괜찮은지. 내가 좋아하지만 막상 손이 안 가는 옷이 어떤 옷인지, 몇 번 입지 않아도 꼭 필요한 옷의 종류가 무엇인지. 발 모양이 특이해 신발은 꼭 신어보고 사야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됐고, 꼭 비싼 신발이라고 발이 편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됐고, 편하지 않으면 못 신는다는 것도, 특정 브랜드의 신발이 내 발에 잘 맞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아기자기한 소품을 좋아한다는 것은 원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소품에 쌓이는 먼지를 열심히 닦을 만큼 부지런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켜켜이 먼지 쌓인 물건들이 싫어 비싸게 준 물건들을 죄다 버리고 싶어지는 감정을 경험하는 것도 현명하고 계획적으로 소비했다면 느끼지 못했을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물건을 소비했을 때뿐만 아니고 서비스를 소비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서비스들을 소비한 것은 특히 더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또 그렇지만도 않다. 운동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20회씩이나 끊어 한 PT도 1:1 필라테스도 꾸준히 하지 않기 때문에 몸에 딱히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어쩌면 버리는 돈 같아 보이기도 하는데 이제 돈만으로 내 몸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당연한 사실인데 참 비싸게 깨닫긴 했지만..) 스트레스받아 눈에 띄게 빠지는 머리카락에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고 급하게 끊었던 헤드스파도 빠진 머리카락을 나게 만들어 주진 않았다. 오히려 만성 편두통이 있는 나는 머리 아픈 채로 헤드 스파를 받으면 한결 나아지는 경험을 했다. 지금도 가끔 머리가 아플 때 헤드 스파가 생각나곤 한다. 오히려 머리카락을 살려준 건 피부과에서 끊은 머리 주사 15회이다. 이 마저도 사실은 엄청나게 풍성한 머리를 갖게 만들어주진 않는다.(나만 아는 정도로 아주 조금 나아졌다) 목과 다리가 아파서 끊어본 마사지 정기권도 마찬가지이다. 그날은 너무 시원하지만 난 또 근무를 하기 때문에 하루만 오래 앉아있어도 또 아파온다. 그래도 이런 넓고 얕게 이것저것 해본 경험이 다음의 현명한 소비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가끔 너무 힘들면 정기권이 아닌 1일권만 끊어서 피로를 푸는 마사지를 받고, 스파를 한다. 예전의 나는 1일권보다 정기권이 할인되기 때문에 무조건 정기권을 끊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에 써야 하고 무엇에 아껴야 하는지 점점 더 알아가는 중이고 아직도 수많은 바보 같은 소비를 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많은 것들을 얻고 있다.
다행히 이제 내가 충동적인 소비의 쾌락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강제로 쪼개어 돈을 넣어둔다. 적금, 연금보험, 주택청약, 주식 매달 월급날엔 강제로 돈이 쪼개진다.(주식은 내 쇼핑 욕구를 꽤 충족시켜준다. 종목 분석하고 사고팔고 하면 물건을 사는 때의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심지어 돈을 벌게 해주기도 하다니 안 할 이유가 없다. 손해가 나면 물건을 사도 돈은 나가는 것이니 하며 때를 기다린다. 추후에 내 주식 이야기를 풀 수 있는 날이 있으면 그때 더 자세히 쓰도록 하겠다.) 그리고 남은 돈에서 생각 없이 소비한다. 조금 힘든 달엔 더 쓰고 마음이 풍족한 날엔 덜 쓴다. 친구들을 만나야 하면 만나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시간을 보내고 선물을 보내기도 한다. ‘내가 쓴 돈이 어떻게든 내게 돌아올 것이니..’ 하고 이리저리 소비하길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내 이상한 소비가 늘어날 쯤에는 스스로 ‘지금이 그때구나’하며 내 힘듬이 무엇인지 살펴보려 하고 헤아리려 노력한다. 그리고 가끔은 멍청한 걸 알지만 그냥 스스로 멍청한 소비를 용서해주며 넘어가기도 한다. 멍청하지만, 현명하게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 물론 나중에 상황이 또 달라지면 그때는 지금처럼 돈을 쓰지 못하게 될 수도 있겠다 그래도 20대에 열심히 쓴 소비의 경험으로 돈을 더 현명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