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전 시집
윤동주는 논란이 많은 시인이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 한국 문화계는 윤동주의 시가 저항시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도덕 교과서에는 그가 재외동포 시인으로 표기되기도 했습니다. 정작 중국은 운동주의 생가 앞에 거대한 화강암으로 만든 비석을 세우고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 라는 문구를 새겼는데 말입니다.
이 책은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그에 관한 기록을 한 권에 담고자 했습니다. 이제까지 발간 된 윤동주의 시집은 많았지만 그를 위한 서문, 발문, 후기까지 담겨 있는 책은 없었지요.
윤동주 전 시집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에는 정지용의 서문과 유영의 추도 시. 그리고 강처중의 발문이 들어 있습니다.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 앉아 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 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가이든 아모런때 아모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곧잘 그의 넉넉치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 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 전당포에 나들이를 부즈런이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데 대햐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킨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는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발문 - 강처중
2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에는 정병욱의 후기와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가 쓴 '선백의 생애'가.
[독재와 억압의 도가니 속에서 가냘픈 육신에 의지한 항거의 정신, 아니 인간으로서의 처음이자 마지막의 권리이며 재산인 자유를 지키고자 죽음을 걸고 싸운 레지스탕스의 문학이 어찌 유럽의 지성인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일 수 있었으랴!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숨 막히는 현실 가운데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었던’ 동주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시인이었기에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야 했다.] 후기 - 정병욱
3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79'에는 백철, 박두진, 정병욱, 장덕순, 윤일주, 문익환의 후기를.
[‘그의 저항 정신은 불멸의 전형이다’ 라는 글을 읽을 때마다 나의 마음은 얼른 수긍하지 못한다. 그에게 와서는 모든 대립은 해소되었었다. 그의 미소에서 풍기는 따뜻함에 녹지 않을 얼음이 없었다. 그에게는 다들 골육의 형제였다. 나는 확언할 수 있다. 그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도 일본 사람을 생각하고는 눈물지었을 것이라고. 그는 인간성의 깊이를 파헤치고 그 비밀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미워할 수 없었으리라.] 동주 형의 추억 - 문익환
마지막 4부에는 윤동주의 일생을 연대별로 간단히 수록했습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아버지 윤석영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만주 북간도는 일제강점기로 나라를 강탈당한 조선인들이 빼앗긴 문화를 되찾고자 '장재마을'이란 명동촌을 건설하고 기독교와 결합한 민족운동을 펼치던 곳이었어요.
그는 명동 소학교를 졸업하고 은진 중학교를 다니다가 평양의 숭실 중학교로 학교를 옮깁니다. 그러나 일본의 신사 참배 강요를 거부하던 숭실 중학교가 폐교조치되자 광명 중학교로 편입합니다. 윤동주는 명동 소학교에 다닐 때부터 뜻이 맞는 친구들과 간단한 문예지 '새명동'을 만들 정도로 문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15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1936년 간도 연길에서 발행되던 ‘가톨릭 소년’ 이란 소년소녀용 종합 잡지에 ‘병아리’ ‘빗자루’ ‘오줌싸개 지도’ 등의 시를 발표하기도 했지요.
개신교 장로이자 소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장남이 시를 쓰는 것을 반대했지만 윤동주는 시인이 자신의 천명이라 여겼습니다. 문과 졸업하면 신문 기자밖에 더 되겠냐며 법대나 의대를 가라는 호통에도 그는 시를 쓰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1938년 경성(현 연세대학교) 연희 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합니다.
그가 25세가 되던 1941년,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19편으로 된 자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고자 마음 먹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시대에 한글로 쓴 시를 발표하는 건 범죄나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신변을 걱정한 스승과 친구들은 뜻을 보류하는 게 어떻겠냐고 윤동주를 설득합니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그 후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가려 창씨 개명을 신청합니다.
일본으로 건너 간 윤동주는 동경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교련 수업을 거부해 화를 입고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과로 편입합니다. 1943년 고종사촌 송몽규가 독립 운동을 모의한 사상범으로 체포된 사흘 뒤 함께 취조를 받고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됩니다.
그리고 광복을 여섯달 앞둔 1954년 2월 16일, 감옥 안에서 사망합니다.
쉽게 씌어진 시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새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1942.06.03
이후 고인의 자필본을 보관하고 있던 정병욱과 동료들이 1946년 윤동주의 시집을 출간합니다.
그렇다면 윤동주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비록 타지를 떠도는 이방인 신세였지만 어느 곳을 가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확신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시를 오로지 한글로만 썼으며 늘 타인을 거울 삼아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끝없이 고뇌합니다.
그를 둘러싼 현실은 그에게 부정적인 말만 들려주었습니다. 한국인으로 살면 안된다. 시를 써서는 안된다. 이상을 추구하면 안된다. 그는 극복할 수 없는 현실에 눈물 흘리면서도 자신이 추구하는 길을 묵묵히 걸어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시에는 당시의 순수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비 내리던 날, 좁고 어두운 방에 앉아 작은 창문 너머 달빛을 짐작해보던 그의 표정이 떠오르나요? 감당하기 힘든 슬픔으로 목이 메이는 순간, 시는 우리를 위로 합니다.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
당신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나요? 어떤 인생이든 지금 여기 살아간다는 것 만으로, 모든 삶은 응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