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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성 경청꾼 Dec 08. 2023

끝내 잡지 못한

<귀갓길 주객 옆자리에 앉고>

 "부족하지는 않았지? “
 "그럴 리가요." 장난스레 관자놀이와 아랫배를 두드린다. "둘 다 꽉꽉 들어찼어요. “
 "다행이네, 종종 놀러 와. 이 근처에 맛집 많아."
 대식가인 분과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이란 그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장작으로 직접 구운 수제피자 두 판과 슈니첼(이탈리아식 고기튀김) 1인분을 비우고 테이블 두 개짜리 피자집을 나섰다. 내가 사는 지역으로 향하는 버스 시간이 촉박하여 발걸음을 빠르게 놀려야 했지만 소화를 돕기 위해서라면 그마저 가뿐했다. 밥을 먹기 전 2시간 가까이 맴돌던 길이었다. 종종 들르는 버스 터미널의 길을 외울 요량으로 자격증이 있는 지인에게 보행지도를 부탁드렸을 뿐이건만 장인정신이 녹아 있는 맛집까지 든든하게 얻어먹을 줄이야. 나는 버스 맨 앞자리에 올라 보이지 않는 지인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흰 지팡이와 핸드폰, 지갑이 있는지 확인하고 두 손을 가지런히 가방 위에 올렸다. 단전부터 올라오는 들숨과 날숨을 가방 너머까지 느끼고자 했다. '쓰읍, 후우, 쓰웁, 후우.'이어폰에서 들려오는 비트에 맞추어 긴 숨을 골랐다. 다리를 가지런히 하고 엉덩이를 좌석 안까지 당겼다. 허리를 곧추세우자 꽉 찬 위장에도 숨쉬기가 한결 편했다. 다음 순간 정돈된 숨에 균열이 갔다. 옆자리 분이 나의 손을 잡았다. 뜬금없이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와 달리 종교를 가지고 있던 녀석은 실명한 나를 찾아와 내 손을 양손으로 품은 채 무언가를 간절히 읊조렸었다. 이미 흐려진 시야로도 진지한 녀석의 표정이 보였다. 몇 주 전 버스 옆자리에 앉았던 할머님도 기억에 밟혔다. 이름도 얼굴도 모를 그분은 건빵과 식혜캔을 내가 받을 때까지 건네셨다. 잘 먹고 다니라던 걸걸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받아들이면 선의인 한편, 불쾌해해 봐야 내 손해였다. 나는 그제야 옆자리 분의 조심스러운 손길에 무감할 수 있었다. 풍채가 좋은 두꺼운 손가락에 비해 아기처럼 보드라운 손, 왼손 약지에 낀 화려한 반지를 느끼며 정 많은 아주머니를 상상했다. 약하게 향수 냄새가 났다.
 "괜찮지? “ 예상과 달리 중저음의 아저씨였다. "내가 힘들어서 그래.”
 그가 입을 열자 향수 냄새에 가렸던 술냄새가 콧속에 닿았다. 버거운 삶을 아등바등 견디고 계신가 보다. 답지 않은 동정심이 올라왔다. 어색한 웃음을 짓는 나의 반응에 그는 나의 오른손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깨지면 안 되는 유리처럼, 사랑스러운 강아지라도 되듯이. 그는 이야기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내 인생도 내 맘 같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하겠니? “
 "버... 텨야... “
 "그렇지. 버텨야지. 고맙다. 고마워. “
 내 입에서 나온 첫 말소리에 그는 더 신나 했다.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의 두 손 사이에 끼인 내 손은 척척하게 젖어들었다.
 "거 운전 좀 합시다. 시끄럽습니다."
 기사 아저씨의 일침은 맨 앞자리에 있던 우리를 향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한 마디밖에 하지 않았다는 억울함 따위는 없었다. 그가 흠칫 놀라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손을 뺐다. 기사 아저씨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옛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슨 노래였던가? 흥얼거릴 수는 있겠는데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버스 안은 어두운 만큼 스마트폰 화면은 밝았다. 나는 액정을 끈 채로 조작할 수 있게끔 설정을 마친 뒤 인터넷 검색창에 노래의 가사를 적어보았다. 시력이 나빠진 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어두운 화면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일은 익숙지 않았다.
 "너 왜 이렇게 멋있게 생겼니? “
 기사 아저씨의 일침에 방금까지 시무룩해하던 그가 나의 귀를 간지럽혔다. 오른쪽 귀부터 돋아난 소름이 온몸을 찔렀다.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로도 그 딴에는 수줍게, 받아들이기에는 음흉하게 웃는 표정이 보였다. 목적 없이 핸드폰을 두드리는 만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라디오 좀 꺼주시죠. “
 "이거 안 켜면 저 졸려서 운전 못 합니다. 제가 조용히 하라고 하셔서 그러시는 건가요? “
 "그래서가 아닙니다. 제게는 라디오 소리가 참을 수 없이 시끄럽네요. 아니면 이 라디오 소리보다 작게 말할 테니까 저랑 제 동생이랑 얘기 좀 나눠도 되겠습니까? “
 기사 아저씨는 말없이 라디오를 껐다.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둔 두툼한 그의, 아니 내 오른쪽 허벅지에 살짝 댄 그의 왼 손이 떨리고 있었다. 자리를 옮겨야 할까? '수다를 떨 거면 뒤로 가서 하시든지요.' 언성을 높였던 기사 아저씨의 목소리가 내 엉덩이를 무겁게 했다. 그가 따라오면 어떻게 할 텐가. 엉덩이를 최대한 통로 쪽으로 빼서 가능한 한 그와 거리를 두었다. 다행히 금세 진정된 모양인지 그의 떨림이 잦아듦을 느끼며 나는 음악의 볼륨을 높였다. 그리고 버스는 빨간 신호에 길을 멈추었다. 그는 뒤쪽으로 몸을 돌려 일어나 다른 승객들을 향했다.
 "제 조카가! 장애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좀 하려 했더니 기사 분이 대화를 나누지 못하게 만드네요. 여러분이 불편하시다면 저도... “
 "앉으세요. 버스 출발해야 합니다! “
 파란 불에 앞차가 출발했음에도 뒤를 향해 서 있는 그 탓에 버스는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사 아저씨의 호통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저도 그만하겠지만 여러분께서 이해를 좀 해주신다면... “
 "제발 앉으세요. 저희 빨리 가야 해요! “
 저 멀리 아주머니가 소리를 높이자 20여 명의 승객 분들 역시 목소리를 하나로 모았다. 제자리에 앉은 그는 다시금 몸을 떨기 시작했다. 나는 듣던 음악을 껐다. 신경 쓸 것들이 많았다. 그는 전보다 더워진 체온을 내뿜으며 어딘가에 통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떨림은 멎지 않은 채였다.
 "응, 버스 터미널로 좀 나와야겠다." 수화기 너머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의 청력 문제일까? 의문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그건 얘 하는 거 봐서. “
 키패드에 숫자 세 개를 입력한 뒤 통화 버튼에 엄지를 가까이했다. 하지만 바로 옆에 그가 있는데 무슨 말을 할 텐가. '조용히 좀 합시다.' 아까 전에는 그를 저지했던 기사 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나를 멈춰 세웠다. 통화가 힘들다면 문자로라도? '우리 빨리 가야 해요.' 이번에는 그를 앉히던 승객들의 목소리였다. 침묵뿐인 버스 안에서 지금껏 나를 도왔던 목소리가 나를 옭아매왔다. 이 버스의 목적지로 경찰을 부른다면? 하지만 막상 문자를 쓰려해도 타자를 치기는 어려웠다. 신고하려는 선 위에서 그는 줄을 타듯 노닐었다. 내 손 위를 맴돌던 기척을 내다가 자신의 허벅지에 손을 올린 척 내 몸에 새끼손가락을 구물거렸다. 하지만 이 모두가 나의 오해라면. 나는 짧은 세 글자를 지웠다.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30분이나 남아 있었다. 이 침묵에 균열을 내야 할지, 지켜야 할지 머리가 복잡했다. 귓가를 윙윙거리고 나의 손 위를 맴돌다가도 허벅지를 기어 다니는 벌레를 잡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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