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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성 경청꾼 Dec 15. 2023

봄이 먼 이 자리에서 스트레스 한 입

<영화 서울의 봄(김성수)을 관람하고>

 이득을 챙기는 일과 원칙을 지키는 일, 타인을 위함과 자신을 위함이 맞붙는다면 뭐가 더 강할까? 이야기 속에서는 으레 원칙을 지켜 이겨내는 히어로가 자신의 이득만을 좇는 빌런을 이겨낸다. 하지만 현실을 살다 보면 그렇지 못하다는 회의감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이득을 생존과 동일시하는 사람이라면 능히 그 딴에는 절박한, 상대에게는 비열한 방식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정직함이라는 원칙이 있는 사람은 배신을 전술로 채택하지 못하리라. 반면 비무장 협약 후에 상대편 진영에 쳐들어간다면 무주공산에 오르는 일과 무엇이 다를까?

그러한 현실을 매우 절절하게 그린 영화를 얼마 전에 관람했다. 한입씩 먹기 좋게 정성 들여 만들어놓은 스트레스 쌈주머니들이 눈물이 핑 돌 만큼 퍽퍽하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다. 뭐 하러 구태여 돈을 내고 스트레스를 받느냐고? 굳이 공포영화를 보고, 마라톤을 하고, 맵기만 한 떡볶이를 먹는 이유와 비슷하다. 영화를 관람하고 스트레스 지수를 확인하는 챌린지도 유행한다지? 절박한(비열한)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을 더 잘 아는 사람일수록 스트레스는 심할 테다. 하지만 나의 생각이 이 쪽으로 기울어지도록 하고 싶지는 않다. 내 영위를 제1원칙으로 삼아도 좋다는 쪽에 생각이 굳는다면 내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나는 싫다. 지금의 내가 이미 누군가에게는 그러한 사람일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본 사람을 적대하기보다는 ㅡ러지 않고자 노력하고 싶다. 원칙이라기보다는 선호의 영역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영화를 본 첫 감상이었던 위의 단락으로 끝내지는 않으련다.


 퇴근을 앞둔 여느 저녁시간, 지인에게서 간식거리로 일품일 떡을 받아먹겠냐는 연락이 왔다. ‘고맙죠.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요?’ 나의 질문에 우리는 들깨 수제비와 보리밥을 함께 주는 식당에 마주 앉았다. 건강한 메뉴 치고는 든든하게 배를 채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분 입에서 요즘 시대답지 않게 관객수 700만 명이 넘었다던 영화 얘기가 나왔다. 오랜만에 영화관이나 가볼까? 화면해설이 없는 영화를 관람하는 게 얼마만이던가? 듣기만 하는 수준으로도 충분한 감상이 되려나? 나도 사방에서 들려오던 흥미로운 소식에 관심이 생겼었다. '이해 못 하겠으면 나중에 화면해설로 다시 보면 되지 뭐.’ 우리는 20분 뒤에 시작하는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12월 12일이었다.


 한적한 소도시의 이점이란 당장 핫한 영화를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상보다 한산한 영화관의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았다. 커다란 화면은 어김없이 흐렸다. 제로콜라를 홀짝이기도 하고 팝콘을 우적이는 한편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자리에 앉아서도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진지한 음악이 나오면서 영화에 귀를 기울였다. 걱정과는 달리 영화는 친절했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역사적인 사실과 초등 영어 수준의 리스닝 실력이 감상에 도움을 주었다. 요즘 읽고 있는 로버트 그린의 전쟁의 기술이라는 도서에서 소개하는 전술 덕에 흐린 지도의 해상도가 올라갔다. 배우 분들의 걸출한 연기에 표정이 오롯이 담겼다. 노태건의 우유부단함과 노재현의 약삭빠름, 전두광의 절박함과 이태신의 강직함이 뚜렷했다. 특히 '너 똑똑하다고 데려왔더니 모자란 면이 있다.'라는 대사에서 오진호 소령과 정병주 소장의 플롯은 화약냄새와 피냄새 탓에 코끝이 시큰할 정도였다. 물론 듣는 것만으로는 감상에 한계가 있었으리라. 괜찮은 영화라면 다시 보는 것에 시간이 아깝지 않은 법이다. 언젠가 화면해설로 다시 관람할 기회가 생긴다면 앞뒤 재지 않고 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리라.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탓에 귀가시간이 늦었다. 영화를 보고 차에 오르자 따뜻한 곳에 있다가 와서 그런지, 몸에서 열이 나서인지 차 앞유리에 성에가 지지 않았다. 손수건으로 아무리 닦아도, 눈앞은 뿌옇기만 했다. 방법은 창문을 활짝 열고 겨울의 찬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것뿐이었다.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자신의 집까지 그 상태로 가야 할 지인은 잠시 날카로워졌다. 그러한 사정을 다 알고 있었건만 다음날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날 헤어지기 전 예민하게 군 것이 못내 마음에 남았나 보다. 나는 그에게 받은 떡을 오물거릴 뿐이었다. 그제야 미래가 걱정됐던 감상을 한결 맘에 드는 방향으로 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전두광이 외치던 '우리는 하나다!'에 당당히 고개를 젓는다. 결코 하나가 아닐 그와 나는 자신의 자리에서 끊이지 않을 이야기를 나누리라. 그가 나에게 사과를 전한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를 전하련다.


 12월은 추워야 겨울답다.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시린 스트레스가 고맙다. 덕분에 향기로운 봄이 기다려진다. 날카로운 추위 앞에서 제 몸에서 나는 열로 인해 앞이 흐려진대도, 끝내 무너진 적이든 추위든 앞에 사후재가로라도 의지를 보인다. 다가올 봄 앞에 당당하리라. 금세 녹을 경험이 내린 자리에 기록이 소복소복 쌓인다. 맘에 들 자신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맘에 걸리는 일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면 된다. 이토록 추운 겨울에도 계속 바뀔 내 자리 위에 발자국을 남기련다. 봄은 아직 멀어도 스트레스 한 입에 푸른 싹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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