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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비 Feb 15. 2022

[서평]채식주의자 : 우리는 소수자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Written by 하진

 

한강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는 3부작으로 나뉘어 있지만 공통되는 인물은 “영혜”이다. 영혜는 지극히 평범한 여성으로 묘사된다. 외형 뿐만 아니라 말투나 행동, 일과 식사 모두 지극히 평범한 여성이다. 영혜는 꿈을 꾸고 난 후로 집 안의 모든 고기를 버린다. 그 날 이후 한 번도 고기를 입에 대지 않으며 이 여성은 평범을 벗어나게 된다. 남편은 그녀를 단지 이해 못하는 것을 넘어 이해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영혜의 아버지는 고기를 먹지 않는 그녀에게 탕수육을 먹이려 하였고, 이에 영혜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과도로 손목을 긋는다. 입원한 병원에서는 윗옷을 모두 벗은 채 일광욕을 하며 소란이 일었고 이에 그녀의 남편은 더 이상 감당이 불가능하다며 손을 놓아 버렸다. 2장은 가족들 사이에서 “정신병자”로 인식된 영혜의 몽고반점에 흥분한 그녀의 형부의 초점으로 그려진다. 그는 “예술적 퍼포먼스”를 하기 위해 서로의 몸에 바디페인팅을 하고 영혜와 성관계를 한다. 영혜는 다시 정신병원으로 보내지고 영혜는 병원이 더 편하다는 말을 한다. 3장은 입원한 영혜를 바라보는 언니 “인혜”의 초점으로 전개된다. 영혜는 이제 채식 마저 거부하고 거식하며 물만 마시고 살아가는 나무를 꿈꾼다.  



  책을 읽기 전 <채식주의자>에 관해 알고 있던 것은 유명한 작품이라는 것과 생각해 볼 부분을 많이 담고 있는 책이라는 것 뿐이었다. 그 외의 정보는 하나도 없이 책을 펼치고 이틀 밤을 몰입해 읽었다. 소설 속 충격적인 전개와 분위기에 빠져 단숨에 읽었지만, 막상 마지막 장을 읽고 났을 때엔 조금 혼란스러웠다. 책을 읽으며 생각해 볼 포인트나 무언가를 함축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보며 읽어보려 하였지만 그것이 어려웠다. 오히려 내 눈에 가장 선명하게 보였던 “폭력에 대한 저항”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정리했다. 책을 읽고 난 후 해석에 관한 궁금증으로 작가의 입장을 알아보니, 사람들의 다양한 해석이 대부분은 그의 의도와는 다른 오해라고 단언한 것을 알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이 단순히 ‘가부장적인 폭력’에 대한 거부에 관해 이야기한 책이라고 생각하였지만 다시 읽어보며 해석을 달리 해보기 시작했다.



   세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하나의 이야기는 모두 영혜가 아닌 주변 인물의 초점으로 비춰진다. 따라서 해석이 어렵다. 소설 속 영혜는 의식의 흐름과 같은 꿈 이야기를 하거나 뜬 구름 같은 짧은 문장들을 말하는 것에 그친다. 타자의 시선에서 영혜를 바라보는 만큼 나는 주변 인물들의 사고 방식을 따라가기도 한다. 따라서 영혜를 바라보며 “왜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녀의 행동이 비정상적이라는 결론을 내린 채 그 이유를 찾는 것과 같으며 그 부분이 작가가 의도한 부분이 아닐까 싶었다. 처음엔 영혜를 단순히 동거인 혹은 파출부 취급하는 남편과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아버지에 대한 묘사 때문에 단순히 가부장적인 폭력을 비판하고자 하는 듯 했지만 너무 좁은 해석이라고 느껴졌다. 



   단순히 한 가정안에서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3장에서 느껴졌다. 공동체에겐 언제나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이 규칙은 법과는 무관하게 공동체 안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지키는 것이며 이것을 이탈하였을 때 부적응자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한다. 암묵적인 규칙을 크게 어겼을 때, 예를 들어 공공장소에서 탈의를 하는 인물은 정신병자로 취급되어 수용된다. 이 “광기”는 언제부터 인식되었고,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고 판단되었을까.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

 


 그 역사는 17세기로,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인 미셸 푸코는 이러한 “광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현대에는 점점 이러한 “광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감금되는 것에 비탄하였다. 푸코는 광인들의 정리되지 않는 사고와 말들이 사회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다는 점을 중요시하였는데,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광인을 거부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봐서는 안된다고 말해왔다. 공동체가 가지는 하나의 시스템과 사회구조를 넘어서고자 하는 자기 초월을 추구하는 모습이 <채식주의자> 속 영혜와 일치한다고 느껴졌다.


 물론 우리는 소설 속 영혜의 마음을 알 수 없다. 다만 사람들은 다수가 옳다고 하는 그 “육식” , “속옷”, “물구나무 하지 않기” 를 거부하는 영혜를 사회로부터 격리하여 이를 정신 질병이라 처방하였다. 이는 ‘흑백 논리의 오류’이자 다양성에 대한 거부이며 획일적이며 회색분자적인 사회를 꿈꾸는 사회의 모습이라고 판단된다. 영혜는 그 누구보다 평범했고 호불호가 없었다. 광인이라 해서 태어날 때부터 남들과는 다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평범했던 사람이 작디 작은 이유 “꿈”으로 인해 인생을 다르게 보듯 우리 안엔 다양한 시각과 사상, 자기 초월의 의지가 들어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작가는 <채식주의자>를 통해 폭력에 대한 저항과 더불어 사회적 약자, 소수자에 대한 배려와 새로운 시각을 말하고자 하며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사회가 되길 바라는 것이 아닐까. 내가 다수와 다르다 해서, 혹은 통상적인 가치관과 다른 가치를 쫓는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의 문제점이자 단점이라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다. 이는 위험한 사고 방식이라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지나치게 다양성을 수용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방임이 될 수도 있으며 자칫하면 그 소수자들을 방치하여 개인주의적인 사회로 변질될 수 도 있다. 하지만 강요 받는 것에 저항한다고 하여 정신적 폭력을 겪는 것보다 개인주의가 무엇이 나쁘겠는가. 이것이 채식마저 거부하여 거식하는 영혜의 모습을 한 그루의 나무로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다양한 종의 나무들이 각자 자신을 살아가며 , 멀리서 보았을 때 조화로운 숲을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할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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