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을 읽고 written by 하진
과거부터 현재까지 재해와 재난을 주제로 다룬 영화와 소설은 쏟아지고, 보증된 흥행 수표처럼 사용되는 소재이다. 이런 소재를 다룬 매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인간의 힘으로 손 쓰기 어려운 재해와 함께 정의감에 가득 찬 영웅이 등장하고 시민들을 구해낸다. 그 과정 속엔 항상 빌런이 존재하고 권선징악의 결말을 따른다. 항상 희생이 동반되며 재난 속의 갈등은 자극적으로 그려진다. 예시로 떠오르는 작품으로는 <스위트홈>, <지금 우리 학교는>이 있는데 위에 말한 공통점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이에 비하면 김초엽 작가의 <지구 끝의 온실>은 순한 맛이다.
소설은 더스트폴이 종식된지 60년 후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식물 과학자인 아영이 덩굴 식물 ‘모스바나’에 관심을 가진 후 더스트폴 종식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인물들을 만나기를 희망한다. 아영은 더스트폴 시대를 살아온 나오미를 만나게 되고 프림 빌리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곳 주민들은 모스바나가 자신들을 더스트로 부터 지켜준다는 사실을 믿고 세계 곳곳으로 가 식물을 심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 전무후무한 재해를 끝나게 해주었다.
<지구 끝의 온실>은 재난 속의 인간관계, 사상의 부딪힘을 현실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굳이 자극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지 않는다. 나오미는 프림 빌리지에 오기 전 언니 아마라와 폐허를 떠돌았고, 내성종이라는 이유로 연구소에 붙잡혀 실험을 당하기도 했다. 소설 속에선 이 자매가 경험한 충격적인 일들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전혀 없다. 자극적으로 그려내려고 한다면 충분히 가능했을 내용이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점이 뻔하지 않았다. 또한 등장인물을 평면적으로 구성하지 않았다. 프림 빌리지에 대해 반신반의했던 나오미는 그곳에 도착한 후 마을에 완전히 동화되려고 노력하며 그곳 사람들에게 정을 주게 된다. 사실 초반 부 나오미의 설정이라면 타인을 불신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겠지만, 나오미는 아포칼립스 속 한 어린이라는 점에 있어서 어느정도 입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독자들에게 재난 매체가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더욱더 등장인물의 설정과 가치관, 성격에 관심을 갖게 된다. 즉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소재를 접할 때 우린 등장 인물들의 역할을 쉽게 예측하고 반전을 기대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재난 서사를 바라보며, 저 등장인물은 항상 정의감에 가득 차 있고, 어떤 등장인물은 너무 계산적이라 언젠간 이 집단을 배신할 것 같다는 예측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예측은 어느 정도 들어 맞곤 한다. 결말은 대부분 권선징악으로, 착한 사람, 이타적인 사람이 승리하며 이기적인 인물들은 모두 제 욕심에 죽음을 맞이한다.
이 소설이 현실성을 담았다고 평가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기심에 대한 새로운 관점 때문이다. 아영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는데, 그 동안 이런 고난들을 헤쳐온 우리들의 조상은 모두 이기적인 사람이었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에게 발상의 전환같은 부분이었는데,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이는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 몸 하나 지키기도 어려운 시기에 자기 속을 조금이라도 챙긴 사람이 생존하는 것이 슬프게도 사실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을 이기적이라고 보는 것에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좀비 영화를 보게 되면 계속해서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나라면 어떻게 할 것 인지에 관한 질문이다. 나라면 저 사람이 나 대신 희생하게 할 것 인지, 이 호의를 받아들일지 의심할지, 다수를 위해 소수를 포기할 것인지 에 대한 딜레마와 같은 것들이다. 결론은 나를 지키기 충분한 상황에서는 어떤 호의든 베풀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프림 빌리지를 떠난 주민들이 모스바나 확산에 기여하였는지는 소설 속에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세계 곳곳에 모스바나를 확산시켰고 재난 종식에 큰 도움이 된다. 주민들이 진심 어린 이타심에 식물을 심고 다녔을까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이들은 모스바나의 효능일 믿고 단지 타지에 도착한 본인들을 지키기 위해 모스바나를 심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했던 이 행동들은 결론적으로 선순환을 통해 인류를 지켜 세계 재건에 힘이 될 수 있었다.
현대 문화에서 이기심은 금기에 해당된다. 사람들은 이기심은 죄악이며 이웃 사랑이 덕목이라고 가르치고 배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죄가 되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만이 덕목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현대 사회의 실생활과는 모순된다. 나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인간 연대는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말하 듯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라는 말 속에는 자신에 대한 존중, 즉 자기애와 자신의 이해는 타인의 이해와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을 사랑할 것인가 자신을 사랑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지선다가 아니다. 타인을 향한 증오나 자신을 향한 증오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더 어려워, 조금이나마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가능하다. 나오미도, 아마라, 지수, 레이첼 모두 지구를 구해야한다는 신념을 가지지 않는다. 서로 자신만을 생각하지만 그 덕분에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결국 인간이었다. 초인적인 힘이나 정의로 똘똘 뭉친 영웅은 없지만 식물로 지구를 지킨다.
<지구 끝의 온실>을 통해 디스토피아를 헤쳐나가는 또 한가지의 방법을 배웠다. 꼭 상상 속의 디스토피아일 필요 없이 매일 같이 혼란한 시대 속에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한다. 체감되지 않는 재난과 폭력이 사그라들지 않는 요즘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과거부터 서서히 쌓여온 데미지는 어느 새 우리 코 앞에 다가와 폭발하지만 그 속에서 우린 계속 살아가야 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작가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침내 재건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 적고 싶었다고 한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일까에 대해 계속 고민하며 글을 읽었다. 나름 내린 결론은 그 마음은 막연한 이타심이나 정의감은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의 생존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타인을 사랑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로 서로가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따뜻함을 주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초능력일 것이다.
아트비 문화예술 글쓰기 모임
글쓴이 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