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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Apr 28. 2024

치즈가 너무 많다

-153

나는 치즈를 그리 썩 좋아하진 않는다. 아마도 이 짧은 문장 하나를 싸놓고 대번 양심에 찔리는 것은 내가 아직도 그 치즈케이크 맛 크래커를 맛있게 먹고 있기 때문일 텐데,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식으로 주장해 보자면 나는 치즈를 그리 썩 좋아하진 않는다. 매운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매운 음식에 치즈 사리를 올려먹는 것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 영향도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우리 집 냉장고에 슬라이스 치즈 한 봉지 정도는 어지간하면 상비해 놓는 식재료가 되었다. 이유는 별 게 없고 라면의 매운맛을 죽이는 데 특효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남은 찬밥으로 만드는 온갖 종류의 리조또에도 한 장 정도 올려서 녹여 먹으면 나름의 풍미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래는 집 앞 편의점에서 다섯 장에 2천 원 남짓 한 치즈를 사다 놓고 썼지만 요즘은 가급적 마트에 갈 일이 있을 때, 할인으로 나오는 싸고 많이 든 치즈를 사다 놓는 것으로 정책을 좀 바꿔 보았다.


일전의 유통기한 지난 짜장면과, 유통기한 도과가 임박한 게맛살 및 쌀국수에 크게 한 번 데고 나서 이 치즈는 기한이 얼마나 남았는가를 살펴보았다. 5월 1일까지니 이것도 얼마 남지 않은 셈이었다. 그래도 요행히 치즈는 그간 꽤 신경 써서 열심히 먹어 없앤 덕분에 20장 중 18장을 먹어 없애고 두 장이 남아 있었다. 두 장 정도야 뭐, 한 장은 오늘 파스타 할 때 넣어 먹으면 되고 한 장이야 주중에 라면 끓여 먹을 때 넣어서 먹으면 아주 기분 좋게 날짜를 넘기지 않고 다 먹어 없앨 수 있을 예정이었다.


내가 하는 파스타는, 뭐 별 것도 아닌 주제에 온갖 그릇이 종류별로 다 나오기 때문에 한 편으로는 팬에 스타를 볶으면서 틈틈이 나온 그릇들을 설거지 해 넣느라고 늘 혼자 바쁘다. 그러던 서슬에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떨어진 것을 미처 닦지 못해 두어 번 미끄러질 뻔도 했다. 그렇게 허둥지둥 파스타 한 그릇을 만들어서 방으로 가져온 후 물병을 가져오려고 냉장고를 열었다가. 나는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마지막에 치즈 한 장을 넣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그까짓 치즈, 물론 다른 것에 넣어 먹으면 된다. 그러나 위에도 썼듯이 이 치즈는 유통기한이 이제 사나흘 남짓밖에 남지 않은 치즈라는 것에 문제가 있다. 나는 한참이나 "조금 전까지 그렇게나 찰떡같이 생각하고 있던 걸 그새 까먹은" 나의 정신머리를 향해 한참이나 맹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팬은 이미 싱크대 속으로 들어갔고 그릇에 다 담기까지 한 파스타를 치즈 한 장 쓰겠다고 다시 볶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입이 한 발이나 튀어나온 채 파스타를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먹는 내내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사는 거냐며 스스로를 타박했다. 그러느라고. 오늘의 파스타는 그 맛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뭐, 별 일이야 있겠나. 그간 온갖 종류의 식재료로 다양한 실험(?)을 해 본 바, 유통기한 그까이꺼 며칠 넘긴다고 먹어서 죽는 음식은 어지간해서는 없었다. 이 치즈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오래 놓아둘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유통기한을 일주일 정도 넘기는 선에서 무난히 먹어치울 수 있을 것이고 그 정도라면 아무 문제도 없다. 치즈의 소비기한은 유통기한이 지나고도 70일 정도는 된다는 기사도 있다. 그러나, 그래도, 딱 맞게 먹어 없앨 수 있겠다고 세워 놓았던 계획이 이런 식으로 어그러지는 건 역시 짜증스럽긴 하다. 이게 왜 이러냐면 치즈가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 둘이서 먹었으면 한꺼번에 두 장씩은 썼을 테니 저깟 스무 장 짜리 치즈가 이때까지 남아있을 일이 어딨었겠냐고, 그걸 혼자서 스무 번을 먹으려니 이런 일이 생기는 거 아니냐고, 결국 오늘도 나의 짜증받이는 그의 몫이다. 그래, 그래, 다 내가 잘못했다고,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응. 당신이 잘못한 거 맞다. 나는 죄 없다.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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