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득 Jun 30. 2024

가끔은 인형 눈알도 붙일만하다

-216

재택으로 쇼핑몰을 하는 지인이 있다. 처음엔 그야말로 서브잡 수준으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전세가 역전돼서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쇼핑몰 운영에 전념하고 계시는 중이다. 물론 거기에는 조금 복잡한 이런저런 사정이 있긴 하지만.


때아닌 단체 주문이 들어왔는데 포장할 일이 꿈같다고 넋두리를 하시는 걸 듣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일당 주면 해주겠다는 말을 했다. 그랬더니 반색을 하며 두 번 세 번 진짜냐고 물으시기에 조금 당황했지만 가끔 머리 복잡할 때는 손 움직이는 단순노동이 좋기도 해서 한 번 해보자고 오케이를 했다. 그랬더니 오후쯤, 박스에 에어캡에 opp 봉투에 심지어 테이프에 가위까지 풀 세트로 싸들고 집으로 손수 배달을 오셨다. 월요일에 찾으러 오겠다는 말씀도 함께.


오후쯤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고 그래서 창문을 열어둘 수가 없어 찬문을 꼭꼭 닫고 며칠 만에 에어컨을 약하게 틀었다. 그리고 바닥에 퍼지고 앉아 에어캡 재단부터 시작했다. 물건을 opp 접착 봉투에 먼저 넣고, 에어캡에 싼 것들을 테이프를 뜯어 고정하고 박스를 접어 바닥에 테이프를 붙인 후 물건을 담고 윗부분을 봉하면 끝이다. 커다란 에어캡 한 롤을 받았는데 받은 물건의 반 정도를 포장하고 나니 에어캡이 똑딱 떨어졌다. 전화를 해 여쭤보니 길이 계산을 잘못한 것 같다고 내일 한 롤을 더 갖다 주겠다고 하셨다.


저녁 시간 꼬박 바닥에 앉아 자르고 붙이는 단순 노동을 대여섯 시간 가까이 하고 났더니 허리며 무릎이 뻣뻣해져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몇 번이고 아이구 아이구 하는 비명을 질렀다. 다 붙인 박스를 벽을 따라 줄줄이 쌓아놓자니 집안에 골판지 박스 특유의 눅눅한 종이 냄새가 가득하다. 아직 덜 포장한 물건들이며 박스들이 집안 여기저기 너저분하게 널린 것이 영 정신이 사납지만, 그래도 더러 이런 것도 사람 사는 집 같아서 좋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보다도 오후쯤 책상 앞에 앉아있으면 온갖 생각으로 뒤숭숭하던 머릿속이 조각 모음이라도 한 것처럼 아주 깨끗해져서 역시 단순 노동은 이런 맛에 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게 가끔은 인형 눈 붙이는 수준의 단순 작업도 할 필요가 있다니까. 특히나 사는 거 복잡하고 머리가 뒤숭숭하며, 그래서 자꾸만 생각이 땅을 파고 들어갈 때면 더더욱. 이 알바 아닌 알바로 번 돈은 다음 주쯤에 장이나 한 번 보면 딱 맞을 것 같다. 어른들 잘하시는 말대로 삽 들고 땅을 파 본들 백 원짜리 동전 한 닢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이만하면 이번 주말은 썩 보람차게 보내는 셈이 되지 않을까.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리차를 끓이다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