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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l 02. 2024

마제소바를 먹을 때마다

-218

포장해 놓은 박스를 가지러 지인이 오기 전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다. 원래는 간만에 김치볶음밥이나 해 먹을까 하고 긴히 김치까지 한 봉지 사다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대번 집안 여기저기 널려있는 박스들이 마음에 걸렸다. 가뜩이나 날도 습하고 눅눅한데 이런 상황에 김치볶음밥 같은 걸 해 먹으려다가 돈 받고 판매하는 물건에 음식 냄새라도 배면 큰일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두 번 세 번 생각해도 내키지 않아, 그냥 밖에 나가서 대충 먹고 오기로 했다.


이럴 때면 조커 카드 비슷하게 유용하게 써먹는 계란말이 김밥은 얼마 전에 써먹었고, 그럴 때 두 번째 옵션쯤으로 가끔 가는 일본식 라멘집이 있어서 거기나 가 보기로 했다. 그러나 어제는 월요일이었고, 그 집이 쉬는 날이었다. 아차차 하고 아쉽게 발걸음을 돌렸다. 이왕 나온 김에 뭐 좀 먹고 들어갈만한 곳이 없을까를 이리저리 기웃대다가, 이 근처에 무려 마제소바 가게가 새로 생긴 것을 봤던 것 같은 기억이 났다.


원래 나는 마제소바라는 음식을 알지도 못했다. 마제소바라는 음식을 알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 덕분이었다. 갑자기 '맛있는 걸 해주겠다'더니, 고기를 볶고 채소를 다듬고 다시마 식초까지 만드는 손 많이 가는 짓을 한참이나 한 끝에 그릇 가운데 계란 노른자까지 정식으로 올린 아주 그럴싸한 마제소바 한 그릇이 완성되었다. 그렇게 만든 마제소바는 면을 먹고 남은 양념에 밥 비벼 먹는 짓을 좀체 하지 않는 나조차도 밥 한 숟갈 비벼먹자는 말을 저절로 할 정도로 맛있었다. 다만 역시 손이 너무 많이 가서 자주 해 먹기는 좀 곤란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러던 마제소바를 파는 가게가 집에서 걸어서 올만한 위치에 생긴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주문 번호를 보니 내가 개시 손님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오랜만에 사 먹은 마제소바는 맛있었다. 다만 만 원 남짓 내면 이렇게 맛있는 마제소바를 사 먹을 수 있는 가게가 조금 빨리 생겼더라면 그와 함께 자주 와서 자주 먹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씁쓸해졌다. 그는 마제소바를 만들면서 면으로 우동사리를 썼는데 면이 너무 매끄러우면 양념이 잘 배지 않아서 일부러 체에 대고 문질러서 조금 갈기까지 하곤 했다. 오늘 먹은 마제소바는 다른 건 몰라도 면을 일부러 갈지까지는 않은 것 같긴 했다. 그러니까 이런 게 나쁜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마제소바를 먹으러 가도 나는 늘 이런 식으로 그 사람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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