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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l 04. 2024

비겁해서, 백합

-220

이 브런치에 자주 들러 올라오는 글들을 주욱 읽어오신 분들이라면 아마 이 제목만으로도 오늘 쓸 이야기를 대충 짐작하실 수 있지 않으려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제 슬슬 다음 꽃을 사야 할 때가 되었다. 원래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한 달 이상 전부터 벼르고 벼르던 수국을 한 번은 사야 맞았다. 그러나 선뜻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수국은 정말로 크고 풍성하고 아름다운 꽃이지만 그만큼이나 시들었을 때 사람의 마음에 주는 상처도 크다. 작년에 큰맘 먹고 산 수국이 두 번 다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시드는 것을 보고 다시는 안 사야겠다고 결심한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는 모양이다. 요즘 들어 꽃 간수하는 스킬이 조금 늘었는지 예전에 비해 꽃을 조금은 오래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수국에게 받은 상처는 워낙 독보적이라 선뜻 결제버튼에 손이 잘 가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비겁하게도 수국 대신 겨울부터 두어 번을 사다 꽂았던 판매자님의 흰색 겹백합을 오랜만에 주문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백합은 오후에, 주말 내내 허리가 아프도록 박스를 접고 포장해서 쌓아둔 박스를 지인이 가지러 온 그 타이밍에 맞춰서 왔다. 백 개 남짓한 박스를 일일이 1층으로 내려다가 차에 싣는 작업을 하느라 택배가 온 걸 뻔히 알면서도 당장 손질을 해 주지 못했다. 수고 많으셨고 다음번에 또 부탁해도 되느냐는 지인에게 일당만 준다면야 얼마든지 오케이라는 좋은 대꾸를 하고 돌려보낸 후,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뛰쳐올라와 현관에 놓인 박스를 집어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서두른 탓인지 현관을 디딜 때 걸음이 조금 미끄러졌고 그래서 박스가 반바퀴 정도를 돌아 장렬하게 바닥으로 처박히는 참사가 일어났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이 판매자님은 꽃을 보내실 때 줄기 밑둥에 자르기도 힘들 정도로 케이블 타이를 꽉 묶어서 보내시기 때문에 크게 타격은 받지 않았다.


부랴부랴 이파리를 따내고 줄기를 잘라 얼음물에 든 꽃병에 꽂았다. 오늘쯤엔 백합이 올 것 같아서 미리 그간 쓰던 꽃병을 열탕소독까지 해 둔 상태였고 그 꽃병에 얼음물을 듬뿍 담아 꽂았다. 먼 길을 오자마자 바닥에 처박히는 곤욕을 치른 백합들에게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사과도 했다. 그렇게 하룻밤을 자고 났더니 벌써 구름같이 피기 시작한 백합은 잠시 수국에 대한 미련을 잊게 한다. 무엇보다도 일과를 마치고 저역 무렵 살펴보면 아침에 담아두었던 물이 절반 정도로 줄어있는 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받은 상처를 다시 정면으로 맞부딪혀 이겨내는 건 언제나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도저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을 때는 살짝 돌아가는 것도 방법이긴 할 것이다. 수국은 정말로,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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