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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l 15. 2024

아깝잖아

-231

그는 무엇이든 '다 쓴 용기'를 즉시 버리지 않고 잘 모아두는 편이었다. 대단히 깔끔한 성격에다 뭔가 버려야 할 것이 쌓여있는 꼴을 눈 뜨고 못 보던 본래의 성미를 생각하면 좀 의외라고 여겨지기까지 한 점이었다. 그렇게 모아둔 플라스틱 병이나 유리병 등은 라벨을 뗀 후에 병솔까지 동원해 깨끗하게 씻은 후에 말려서 어딘가에든 쟁여놓곤 했다. 어딘가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라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이제서야 하는 말이지만 대단히 그 사람 답지 않은 멘트였다.


그리고 그런 '물건 제때 못 버리는 사람'답게, 그는 그렇게 쟁여두었던 용기를 어딘가 적당하게 쓸 일이 생기면 대단히 기뻐했다. 마트에서 사다 먹은 키위청 병에 보리차와 옥수수 알곡차를 담아서 선반에 올려놓으니 꽤 그럴듯해 보여서 그걸 보고도 자화자찬이 미어졌고 딸기청 병에는 한잔씩 나눠마시고 남은 화이트와인을 따라 냉장고에 넣어두고 요리할 때마다 쓰면서 와인을 꺼낼 때마다 스스로의 안목에 감탄하곤 했다. 거 보라고, 다 이렇게 쓰려고 안 버리고 놔둔 거라는 생색은 덤이었다. 디 큰 남자가 그런 것 하나에 으쓱하는 모습은 생각하기 따라서는 좀 웃기기도 했고 좀 귀엽기도 했다. 그래서 한 번도 면박을 주거나 그만 좀 하라는 식의 핀잔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떠난 후로 그가 했듯이, 나 또한 이리저리 생기는 유리병들이나 온갖 용기들을 홀랑 버리지 못하도 일단은 쟁여둬 본다. 혹시 어딘가에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여기에는 몇 가지 맹점이 있는데, 다 쓴 용기를 씻어서 쟁여두는 것까지야 아무나 할 수 있지만 그 쟁여둔 용기를 잊어버리지 않고 적시적소에 찾아서 쓰는 센스는 아무나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내 경우는 씻어서 쟁여놓는 것까지만 잘하고 잘 꺼내 쓰지까지는 못하고 있긴 하다.


그러다가 간만에, 그렇게 쟁여놓은 유리병 하나를 사용할 절호의 찬스가 왔다. 주인공은 주말내내 사람을 빈정상하게 만들고 있는 저 수국이다. 수국은 줄기가 상당히 굵고 튼튼한 꽃이긴 하지만 꽃 얼굴도 그만큼 커서 키가 큰 꽃병이 필요하며, 그렇지 않았다가는 얼굴 무게 때문에 드러누운 수국의 줄기가 들려서 물 밖으로 나와버리는 곤란한 상황도 더러 연출되곤 한다. 사용하는 꽃병은 서너 개 정도가 있지만 두 개는 높이가 낮고 키가 큰 꽃병 두 개는 좁고 길게 생긴 타입이라 수국을 잘 감당해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고심하던 참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스파게티 소스 다 먹고 병 씻어놓은 것이 딱 안성맞춤이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한번 더 깨끗하게 씻고 얼음물을 담아 수국을 꽂으니 아주 적당했다. 문제는 그렇게 딱 마침맞은 꽃병을 구한 보람도 없이 수국 세 녀석이 돌아가며 사람을 애먹이고 있다는 것이지만. 하나 더 있다. 쟁여놓은 유리병의 딱 맞는 활용처를 간만에 그 누구의 힌트도 없이 찾아냈지만 아무도 그걸 칭찬해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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