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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할 일이 생기면 으레, 길이 아주 엉뚱하지 않은 이상 봉안당에 들렀다 온다. 경기도에 산다는 것은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과 길에 버리는 시간과 '그 정도면 가깝다'고 여겨지는 거리의 범위에 아주 너그러워진다는 뜻이다. 한때는 나도 버스 기다리는 시간이 5분만 넘어가도 혀를 차고 발을 구르며 이 미친 버스 왜 이렇게 안 와 하고 짜증스레 중얼거리며 고개를 있는 대로 빼서 차도를 노려보던 서울 사람이었다. 그러나 경기도에 내려온 지 10여 년 만에, 나는 버스는 10분 안에만 오면 아주 빨리 오는 것이고 차를 한 번 정도 갈아타고 갈 수 있는 곳은 어디든 갈만한 곳이며 오며 가며 길에 두세 시간 정도 버리는 것은 목적지가 같은 행정구역 내가 아닌 이상 지극하 당연하게 생각하는 훌륭한 경기도민으로 거듭났다. 그래서 나는 외출할 일이 있으면 볼일을 보고 난 후든 전이든, 웬만하면 그의 봉안당에 들러서 얼굴을 보고 집에 온다. 그러느라고 빡빡하게 잡으면 두세 시간이면 충분할 외출은 거의 그날 하루를 다 잡아먹게 되긴 한다.
오늘도 본래는 그럴 예정이었다. 점심시간을 피해 오전 중에 간단하게 볼일을 보고, 그를 보러 봉안당에 갔다가. 지난 몇 달간 사람 골머리를 꽤나 소소하게 썩이던 일 하나가 그럭저럭 무사히 마무리된 기념으로 하다 못해 돈가스라도 한 장 사 먹고 집에 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늘 오후쯤 갑자기 일정이 바뀌었다. 굳이 나가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상대방 측에서 검수차 보내준 내용을 꽤 마음에 들어 해서, 그냥 자기들 선에서 출력해서 알아서 쓰겠다고 한다. 그러니 나로서는 굳이 오늘 나갈 필요는 없어지고 말았다. 부쩍 추워진 날씨에, 도대체 뭘 입고 나가야 하는가부터 고민스러운 이런 날씨에, 나갈 일이 취소됐다는 건 집순이인 내 본연의 자세로서는 매우 고맙고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나간다. 다른 이유는 없다. 달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난 한 달 무사히 잘 보냈고 또 달이 바뀌었노라고, 당신이 거기 가서 살펴준 덕분에 서너 달 넘게 사람 머리 아프게 하던 일 하나가 꽤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그러나 내 인생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 다른 이런저런 일들이 태산같이 산적해 있으니 그 일들도 어떻게 잘 좀 부탁한다는 아부 아닌 아부를 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한동안 외출이 잦던 시기에는 일주일에 두 번식 들러서 그의 자리 앞에 꽃을 바꿔놓고 왔었다. 그러나 이번애는 10월 말쯤 한 번 다녀온 후로 달이 바뀌고도 오늘까지 가지 않았으니 아마 앞에 둔 꽃이 많이 시들었을 것이다 그것도 갈아주러 가야 하겠고.
이제 앞으로 한 몇 달간, 날은 점점 추워질 것이다. 좀 있으면 눈도 올 것이고 길도 얼 것이다. 그가 쉬고 있는 봉안당은 언덕 구릉에 있고, 버스에서 내려서 그 구릉을 올라가는 것도 버스를 타기 위해 내려오는 것도 똑같이 고역이다. 겨울의 한가운데 오늘쯤엔 가봐야 하는데 도저히 날이 너무 추워서 못 나가겠다 싶은 '찬스'를 한 번 쓰려면 지금쯤 부지런히 다녀놔야 할 것 같다. 아니, 그걸 누가 옆에 붙어 앉아 저 사람이 봉안당에 몇 번 왔다 가는지 세는 사람이 있을 것도 아니겠고 그간 쓴 글대로 그렇게 의 좋은 내외지간이었다면 추운 겨울날 발길 좀 뜸하다고 새삼 뭘 섭섭해하겠느냐고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실은 내 생각도 그렇다. 그냥, 핑계 없는 무덤이 없으니 그런 핑계를 대고서라도 그를 보러 가는 것일 뿐이다. 외출할 핑계가 사라져 버렸으니 달이 바뀌었다는 핑계를 대고서라도.
집에 나가지 말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가고 싶으면 나가면 될 일인데, 굳이 굳이 이런 식으로 핑계를 찾고 있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기에, 너무 자주 온다고 귀찮아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별로 그럴 거 같지 않은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