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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Dec 08. 2024

햅쌀의 맛

-376

세상의 모든 물건은 거의 예외 없이 한꺼번에 많이 사둬야 싸게 먹힌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품목이라고 하면 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쌀은 대개 2킬로그램에 만 원 정도 하는데 두 배가 조금 넘는 5킬로그램이 2만 원 전후면 살 수 있으며 다섯 배가 되는 10킬로그램은 4만 원 전후면 살 수 있고 20킬로그램은 8만 원 정도면 살 수 있다. 즉 개별포장으로 2킬로그램짜리 쌀을 여덟 봉지를 사는 가격과 20킬로그램짜리 한 포대를 사는 것과 가격이 거의 비슷하다는 이야기다.


우리 집 또한 이런 걸 모르지는 않아서, 한동안은 10킬로그램짜리 쌀을 샀었다. 20킬로그램쯤 되어버리면 보관 문제도 있거니와 쌀을 너무 길게 먹게 되어서  곤란했고 10 킬로그램 정도면 딱 맞았다. 그가 떠나고 난 뒤로도 한동안은 그랬다. 그러다가 3분의 1포대 정도를 때아닌 쌀벌레로 몽땅 버리고 나서는 더럭 겁이 나서 5킬로그램짜리 쌀로 되돌아갔다. 조금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편이 나 혼자 먹기에는 딱 맞는 것 같다.


마트에서 적당히 주문해서 먹던 쌀이 까딱까딱 떨어져 가서 쌀이나 좀 살까 하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24년 햅쌀이라는 표시가 붙은 쌀들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아직 연말에 가까워 오도록 올해 햅쌀을 사다 먹어보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에 적당한 쌀 하나를 골라 주문했다. 그리고 어제 드디어, 그 쌀로 밥을 해서 먹었다. 딱히 품종이 있는 쌀도 아니었고 등급이 최상도 아니었는데도 금방 한 밥에서 윤기가 흘렀고 취사가 끝난 밥통을 여는 순간 고소한 밥 냄새가 났다. 그래서 별다른 반찬도 없이 말갛게 끓인 콩나물국 한 그릇만 놓고도 아주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허영만 화백의 '식객'애 메뉴가 오직 간장과 기름 발라 구운 김과 쌀밥뿐인 유명한 맛집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다. 그 집으로 외국인 바이어를 접대용으로 데리고 오는 회사가 매우 많다는 말과 함께. 사실 밥이 맛있으면 그 어떤 거창한 반찬도 필요 없고 정말 간장과 구운 김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른 온갖 맛은 다 그렇게 귀신같이 잘 보면서 유독 밥맛만은 잘 모르겠다고, 네가 이번 쌀 맛있다 하면 그런가 하고 이번 쌀 별로다 하면 그런가 한다고,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서 요즘도 가끔 생각한다. 다른 건 몰라도, 거기 가서 밥맛 대신 봐주는 내가 없어서 어디 오래된 쌀로 퍽신한 밥이나 해 먹고 사는 거 아니냐고. 그렇더라도 그건 다 당신이 날 놔두고 의리없이 도망간 탓이니 할 수 없는 일이라고도.


그렇게 양껏 맛있는 밥을 지어먹은 것이 무색하게도 나의 일상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에는 결국 실패했다. 그렇지만 요즘 유행하는 어느 아이돌의 노래 제목대로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으'니까. 무엇에든 약간의 시간이 필요한 법인지도 모른다. 전기밥솥에 밥을 하려면 아무리 쾌속취사를 눌러도 20분의 시간 정도는 필요하듯이.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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