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득 Dec 19. 2024

기억의 습작

-387

'요즘 노래'랑은 통 담을 쌓고 살아서 요즘도 그런 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유명한 기획사 소속도 아닌 이름 없는 가수가 낸 음반이 순전히 입소문만으로 15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내는 것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하던 거의 마지막 시절쯤에 존재하던 가수 중에 '전람회'가 있었다. 전람회의 1집 앨범이 나온 건 고등학교 때였는데 나 또한 친구에게 '영업'을 당해 한 번 들어보고는 '이건 무조건 사야 해'를 부르짖으며 당장 용돈을 털어 테이프를 샀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몇 년 전 영화 '건축학 개론'의 개봉과 함께 '기억의 습작'이 역주행했을 때도 아니 이 좋은 노래를 그간 다들 모르고 살았더란 말이냐고 되레 놀랐던 기억도 있다.


그도 나도 '전람회'를 좋아했다. 나는 김동률의 선이 굵고 나직한 목소리를 좋아했고 그는 서동욱의 미성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전람회'는 그리 오래 활동한 팀이 아니었다. 아쉽게도 그들은 달랑 세 장의 앨범만을 '전람회'라는 이름으로 남겨 놓고는 각자 자신의 길을 갔다. 특히나 2집의 수록곡 '새'는 그가 떠나버린 후 한동안 내 '눈물버튼'이기도 해서 그 어디쯤 있나요 내게 닿을 순 없나요/그대 없는 이 세상에 내 쉴 곳은 없나요 하는 부분은 그야말로 들을 마다 울었던 기억이 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나라의 국민을 상대로 계엄을 선포한 후 날마다 머리가 아프도록 쏟아지는 온갖 속보의 홍수 속에서, 나는 낯익은 이름 하나와 그 옆에 붙어있는 '부고'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잠깐 멍해졌다. 옆에 적혀있던 이력이 너무나 낯설어 아닌가 했지만(그는 음악을 그만둔 후 모건 스탠리 같은 유명한 회사에서 일했던 모양이었다) 그 사람이 맞았다. 향년 50세라는 표기 앞에서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떠난 사람과 그는 동갑이었다.


순간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그를 떠나보내고 나서 가장 힘들었던 점 중의 하나는 그가 '너무 빨리' 떠났다는 거였다. 백세 시대니 뭐니 하는 세상에, 그 절반도 채 못 산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식으로 홀연히 세상을 떠나간다는 게 과연 말이 되는 건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하는 것들에 대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래서 그 기사를 보는 순간 더 가슴이 먹먹해졌다. 정확히 어떤 기분인지 잘은 모르겠다. 결국 떠나가는 것에 나이 같은 건 아무런 핑계도 되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었던 것도 같고 그 나이에도 충분히 사람은 이 세상을 등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던 것도 같다. 그리고 그때가 아니라 지금이었더라도 나는 아마 그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고, 결국 그가 몇 살에 내 곁을 떠나든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던 것도 같다.


그를 떠나보내고 이 브런치를 시작하면서 유달리 남의 부고에 민감해졌고 그래서 이런저런 사람의 부고에 명복을 비는 글을 썼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오늘 쓰는 글이 가장 가슴이 먹먹한 기분이다. 두 사람의 나이가 동갑이라 그런 것인지, 그래서 상주 란에 적혀 있던 고인의 가족들에 순식간에 내가 투영되어 버린 탓인지, 혹은 아주 오래전 마냥 좋기만 했던 그 시절 새로 발매된 전람회의 앨범을 이어폰 한 쪽씩을 나눠 끼고 같이 듣던 그 시절의 추억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전람회' 멤버이셨던 고 서동욱 님의 명복을 빈다. 그러나 아무래도 '전람회'의 노래는 당분간 듣지 못할 것 같다. 듣게 되면 또, 한동안 그쳤던 눈물이 다시 날 것 같아서.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