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무슨 날, 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날은 딱히 그날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도 괜히 그날 해야 한다는 뭔가를 하지 않고 넘어가면 찝찝하고 신경 쓰이고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그런 마력이 있다. 3월 3일에 삼겹살을 먹지 않거나 4월 14일에 짜장면을 먹지 않고 넘어가면 괜히 손해 보는 기분이 드는 것 같은 그런 거 말이다. 그리고 내게는 동지 또한 그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날이다. 삼겹살이나 짜장면과는 달리 팥죽을 썩 좋아하지 않는데도 그렇다.
아주 막연하게 동지는 대개 크리스마스 하루이틀 전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어서, 뜻하지 않게 올해 동지는 조금 이르다는 얘기를 인터넷에서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 그러고 보니 동지가 바로 내일(요컨대, 글의 발행일자로 따지면 오늘)이네. 내일은 다들 바빠서 죽 한 그릇 배달시켜 먹으려다가는 밥때 다 놓치게 마련일 테니 작년에 그랬고 또 재작년에 그랬듯 오늘 미리 주문해서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내일 점심때쯤 끓여 먹으면 딱 좋겠다. 그렇게 플랜을 다 짰다. 나름 배달 플랫폼을 뒤져 있는 쿠폰 없는 쿠폰까지를 다 긁어서 가장 저렴하게 주문할 수 있는 집도 봐 두었다. 그래서 이제 주문을 하고, 주문한 죽을 한 김 식혀서 냉장고에 잘 넣어두기만 하면 동지팥죽과 내일 점심까지를 한큐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내심 으쓱해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주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죽집의 배달 메뉴에 '동지팥죽'과 '단팥죽'이 따로 올라가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좀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동지에는 그냥 팥죽 먹으면 되는 게 아니었어? 팥죽에도 동지팥죽 안동지팥죽이 따로 있는 거야? 메뉴 설명을 열심히 읽어보니 동지팥죽에는 통팥과 쌀알이 들어가고 단팥죽은 그렇지 않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차이가 왜 동지팥죽과 안동지팥죽의 차이를 만드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결국 인터넷을 뒤져 봤다. 결론적으로 찹쌀과 팥을 사용해 끓이는 덜 단 팥죽이 동지팥죽이고 설탕을 넣고 새알심도 듬뿍 넣어서, 팥을 갈아서 달고 되직하게 끓이는 것이 단팥죽이라고 한다. 나 말고도 동지에 팥죽 한 그릇 먹어보려다가 이 때아닌 팥죽 논쟁에 휘말려 든 사람이 적지 않은지, 이런 식의 요즘 말로 '앙딱정'한 정리가 꽤나 여러 군데에 되어 있었다.
그래서 둘 중 뭘 시킬 것이냐.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단팥죽'을 시키기로 했다. 어차피 팥죽은 원래 썩 좋아하지도 않고 그나마 동지에 한 번 먹는 것도 그 달달한 맛에 먹는데, 몸에는 덜 좋을지는 몰라도 그냥 내 입에 맞는 걸로 먹는다고 뭐 그리 크게 나쁠 것 같지도 않아서였다. 그렇게 주문한 단팥죽은 정확히 40분 후에 집 앞까지 안전하게 배달되었고, 지금은 냉장고 속에 얌전히 잘 들어 있다. 모르긴 해도 오늘 동지땜을 하겠다고 죽집에 주문을 하는 것보다야 훨씬 쉽고 편하게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동지에 굳이 팥죽을 먹는 이유는 팥의 붉은색이 온갖 상서롭지 못한 것을 쫓아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도, 이 브런치에 오시는 모든 독자님들도, 아울러 우리나라에도 상서롭지 못한 것들이 모두 물러가는 동지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정말로 간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