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에 대하여
소유의 세 가지 층위와 구조적인 조작
소유는 그 자체로 자신을 탈영토화하는 기계와 같아서, 맥락의 장단에 맞추어 끊임없이 자신의 의미를 창출한다.
피천득의 수필에 나오는 거지는 자신이 가진 은전 한 닢의 '소유'를 추구한다. 거지는 감각적인 사물로서의 '은전'이 스스로에게 주어지기 전에도 기표로서의 그것을 추구하였을 것이며, 그것이 주어진 후에도 타인으로부터 그것의 소유여부 - 자신이 은전과 맺는 상상적이고 상징적인 관계 - 를 보증받으려 한다. 흥미로운 것은, 적어도 그 거지 자신의 발언("그저 이 은전 한 닢이 가지고 싶었습니다")에 준거하면, 이러한 추구행위의 '외부적 중심좌표'가 부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수단이자 동시에 목적이다. 그것은 자기 내부의 '역동적 생명력'으로부터 추동되지만 동시의 타자의 욕망, 혹은 인정과도 관계를 맺는다. 이 원초적인 추구행위가 라캉이 제시한 '원(願)-함'의 두 가지 형태인 '필요(본능적 소유욕)'와 '욕망(타자-사회가 개입된 것)' 중 어디에 속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한가지 명증한 것은, 이때의 소유는 주체 자신의, 혹은 주체와 타자(들)이 맺는 "협소한 역학"의 틀 안에서 의미가 창출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소유를 더 먼 범위까지 끌고갈 수 있는 맥락을 알고 있다. 그것은 사회적이고도 윤리적인, 보편적 정의의 관점에서 창출되는 의미이다. 소유(권)와 사회 정의를 결합시킨 예는 무수히 많다. 나는 이 에세이의 골조를 보강하기 위해 로크, 베버, 롤스, 노직 그리고 프리드먼을 끌고 올 수도 있겠지만(내가 좀 더 저들에 대해 잘 알고, 좀 덜 '공허하며 붕 떠있고', 좀 덜 귀찮았더라면), 여기서는 내가 지난 일주일 동안 천착해 있었던 <성경>의 일화를 이용하고자 한다.
<마태복음> 22장 15~22절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에게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가"? 라고 질문하며, 예수에게 은전 한 닢을 제시한다. 예수는 이를 긍정할 시 유대인들에게, 부정할 시 로마인들에게 곤란한 상황해 처해질 것이었다. 이에 예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쳐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감각적 사물에 불과한 '데나리온 은화(그리고 웃기게도 그것은 바리사이들의 '소유'였을게 분명하다. 야야 은화 하나 있냐? 꺼내봐 ㅋㅅㅋ)' 로부터 '세금' 이라는 기표의 표상이 제시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특정한 소유의 당위('카이사르의 것')가 준거되고 있으며, 동시에 소유와 사회 정의에 대한 보편적인 통찰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때의 '소유' 개념의 의미화/향유는 앞선 피천득의 수필의 예시와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앞선 예시의 소유주체인 거지에 대응하는 모 바리사이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예수의 법/전언/상징화라는 가장 준엄한 맥락과 맞이하여, 정의의 영역으로 미끄러진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어야 한다. 이는 결코 자기반복적인 테제가 아니며(감각사물로서의 은화가 현전과는 다른 상태에 놓여야 함을 함축하기 때문에), 응분의 '이렇게-되어야-함', 윤리적 당위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소유는 또한 주체가 대상과 맺는 지향적 관계를 함축하거나, 의미한다. 주체가 무언가를 소유하려면, 혹은 최소한 소유하고자 하려면, 그는 그 무언가를 기표적으로, 혹은 관념적으로 대상화해야 -떠올려야- 한다.
이처럼 '소유'의 의미는 맥락적으로 다변화되어 있으며, 본인은 그 중 세 가지를 범주화해보려고 시도하였다. 주체의 필요, (인정)욕구를 의미하는 소유와, 응분의 당위와 정의로서의 소유, 그리고 주체가 대상과 맺는 지향적 관계를 지시하는 관념으로서의 소유. 여기서 논의를 마치면 필요 이상으로 글이 비생산적이 될 것 같기에("그래서 뭐 어쩌라고") 과감한 논점을 하나 제시해보고자 한다.
무엇인고하니, 언제나 배후의 악역을 담당하는 "가장 원론적인 형태의 구조"인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앞서 제시한 소유의 '탈영토성'이 특정 정치/경체제제와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감히 주장한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주체들은 예루살렘을 소유(탈환)함으로써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신이라는 준엄한 대타자에게 인정받고자 하였고, 그것이 정의라고 믿었으며, 예루살렘과 성(聖)적인 관계를, 지향성을 상정하였다. 이를 통해 '소유'가 지닌 탈영토성과, 그 각각의 맥락이 지닌 인류(?)적 보편성을 확보하고자 하는게 내 첫 번째의 과감함이다.
두 번째의 과감함은, 비록 소유의 이러한 성질이 특정 체제와 '무관'하게 보편적으로 존재함에도, 그것은 결코 체제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는데에 사용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클리셰적인 자본주의 비판이자, 본인의 작품을 어떻게 마무리해야할 지 모르는 작가가 급조해낸 진부한 엔딩임을 고백한다) 앞서 범주화한 세 가지의 맥락은 현대사회에서 상품성과 물신성, 그리고 자본주의적 구조 하에 '관통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주장하였듯이 자본주의는 모든 대상(Das ding)에게 물신성을 부과하며, 이는 주체가 대상과 맺는 지향을 상품적으로 획일화(혹은, 강한 가치적 주장을 내포한 워딩인 '오염')시킨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는 주체 자신의 욕망과 타자들과의 관계맺음으로서의 '협소한 역학'적 소유를 의도적으로 조장하거나 통제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자본주의는 이 모든 행위에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정의를 부과한다. 100m 달리기라는 통제된 필드 위에 주체들을 나열한 뒤, 결승선을 욕망하는 마약을 먹인 후, "결승선을 통과하는 사람이 '옳은 사람'이다!" 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로도 꽤나 잘 굴러간다. 꽤나, 적어도 모두가 자신의 거세된 실재와 금제를 향해 '물리적인 형태의' 죽음충동으로 내닫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조금 덜 씹덕처럼 말하자면,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붕괴하지 않고 영속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곳에는 어쨌거나 승자도 있고, 승자를 정하는 합리적 규칙과 원리도 있기 때문에.
그러나, 아무리 실존주의가 퇴폐적이고 구조적으로 허황된 구닥다리라고는 하나, 그것을 -'사람자체'가 지니는 가치와 가능성- 동경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적어도 건방지게 결승선을 그어놓고 금빛 천으로 우리를 투우하는 구조를 간과하고 싶지는 않다. 최소한의 낭만. 그것에 대해 반항은 하지 못할지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