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를 즐기는 것이 바로 이기는 조건이 된다 - 헤일어윈
우리는 살아가면서 일반적으로 돈과 권력 그리고 명예를 원한다. 이들은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진다. 그러나 , 이런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자나 그렇지 않은 자의 행복의 차이는 사실상 그다지 크지 않다고 한다.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 (Richard Easterlin)은 소득이 증가하면 일정 수준까지는 행복도 증가하지만, 그 일정 수준을 넘으면 소득 증가가 행복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더 많이, 더 높은 곳만 쫓다 보면 늘 결핍을 느끼기에 만족할 줄도 모른다. 현재 누리는 지위나 재산, 건강과 인간관계는 늘 변하기 때문이다.
골퍼라면 누구나 파 3홀에서 홀인원을 한 번쯤 기대한다. 홀인원 확률은 골프 다이제스트 기사에 따르면 150야드의 거리에서 투어프로 골퍼의 경우에는 1/3,000 정도, 싱글 골퍼는 1/5,000 정도이고 초보자는 1/12,000이라고 한다. 운(運)도 따라주어야 하기에 그만큼 어렵다.
나도 파 3홀에 가면 혹시? 하고 기대해 보다가 역시! 하고 꿈을 접고 만다. 동반자가 홀인원 하는 경우를 직접 목격한 사례도 겨우 두 번밖에 없다. 한 번은 그린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친 샷인데 그린에서 공이 보이지 않아 찾았더니 홀인원 되어 있었다. 또 한 번은 동반자가 바라보는 눈앞에서 깃대 좌측에 떨어져서 흘러가다가 홀인원 되었다. 행운이 행복을 불러온다. 모든 동반자의 축하 속에서 그린 위에서 큰절을 올리고…
심지어 대회에 참가하는 프로선수들조차도 승용차 등 엄청난 보너스가 걸려 있는 홀인원 상품 때문에 혹시나 하고 기대를 많이 한다. 실제로 거의 매 대회에서 홀인원을 하는 선수가 나온다. 그런 기대를 한다는 것도 사실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로또에 당첨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당첨 결과를 보기 전까지는 행복을 꿈꿀 수 있듯이. 실패해도 또 기회는 오는 거니까. 홀인원을 하지 못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 기대한다고 그다지 문제가 될 것도 없지 않은가. 꼭 홀인원이 아니면 어떠냐. 아마추어들은 라운드하는 동안 버디 하나만 해도 하루 내내 기분이 좋다. 버디 하나라도 더 해보려는 열정. 기대. 그 자체를 꿈꾸고 즐기면 된다. 버디버디 한 인생. 멋진 순간을 상상하는 자체가 즐거움이다.
2021년 도쿄 하계 올림픽에서 우리의 탁구 신동 신유빈에게 풀 세트 접전 끝에 패한 58 세 중국계 룩셈부르크 선수 니시아리안은 막내 아이와 동갑인 41세 아래 여고생에게 진 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보다 젊다 . 도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즐기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2021년 LPGA 올해의 선수·상금·다승 타이틀을 싹쓸이했던 고진영 프로는 어느 인터뷰에서 골프선수로서의 삶과 개인적인 생활의 비중을 어떻게 두는가 하는 질문에, “나는 골프선수 고진영의 삶보다 인간 고진영의 삶을 중요시한다. 비율로 따지면 30%와 70% 정도”라고 답했다. 그리고 “골프에만 너무 집중하면 놓치는 것이 많다. 프로가 되더라도 골프만 잘하는 사람보다는 자기의 삶도 잘 보듬으면서 골프까지 잘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남자친구도 못 만나고, 탄산음료도 못 마시면서 골프를 잘 치면 의미가 있을까”라고 되물으며 “행복하게 골프를 하는 게 중요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2014년도에 인도 델리 골프 클럽에서 진행된 Hero WOMEN’S INDIAN OPEN 2014 유러피언투어 골프대회에 딸이 참가하게 되어 동행한 적이 있었다. 이 투어에 참가한 몇몇 한국 선수들을 현장에서 만나보았다. 이들은 중국투어, 캐나다투어, 아시안투어 등 세계 곳곳의 투어를 찾아다니면서 도전하고 있었다. 누가 제대로 알아주지 않아도, 골프투어 자체를 즐기면서 세계를 당차게 홀로 다니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자기만의 행복을 찾아서 제대로 즐거움을 누리는 진정한 프로들이었다. 우승하면 더 좋겠지만 우승이 아니더라도 투어 활동 그 자체로도 행복해 보였다.
이 대회에는 많은 인원이 입장할 수 있는 대형 막사가 설치되어 있었다. 내부에는 식사와 음료뿐만 아니라, 음악 DJ가 신나게 음악을 틀어주며 축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었다. DJ가 있는 골프장! 당시 국내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선수들은 물론 동행한 부모, 관계자들도 계속 들락날락하며 맛있게 식사도 하고 차를 마시면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이 국제 대회를 진심 즐기고 있었다. 참 행복해 보였다. 이들은 성적에 무심한 사람들인가? 그렇지는 않았다. 딸과 함께 대회에 참가한 동반자 인도 선수도 성적에 매우 예민했다. 예선에서 비록 함께 탈락했었지만, 뉴욕에서 요가강사 생활을 병행한다는 그녀는 그냥 이런 행사 참여 자체에 큰 의미를 두는 듯했다. 치열하게 성적 위주로 늘 전쟁 같은 국내 대회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우리도 즐기는 골프대회로 만들면 어떨까 하며 부러웠던 기억이 있다. 최근 국내 대회장에 가보면 예전과 달리 우리도 이젠 즐기는 축제 분위기로 변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시합이라는 명분으로 즐거움을 옭아매지 마라. 이것은 골프에 대한 모독이다. 골프는 시합이고 뭐고 간에 즐거워야 한다. 즐기고 또 즐겨야 한다.” 이종철 프로의『골프, 마음의 경기』 책에 나오는 글이다.
골프가 주는 즐거움은 의외로 많다. 스코어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프로 골퍼도 시합하는 중에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날씨와 장애물의 극복과 도전, 적절한 긴장과 우연이 찾아오는 행운, 스윙이나 퍼트할 때 오는 타구감과 짜릿함, 동반자와의 즐거운 만남, 목표 달성에서 오는 기쁨, 갤러리의 박수와 함성 그리고 응원하는 소리, 팬들의 따뜻한 눈길, 방송 카메라를 통해 자신을 멋지게 보여주는 기회, 상금에 대한 기대, 상위권으로 진출 가능 등등 이런 질박한 상황에서도 행복의 요소를 찾아보면 의외로 많을 것이다. 갓 20대 젊은 선수들이 골프가 주는 이런 맛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행복의 나라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제대로 여유를 찾을 수 있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인생이든 골프든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거나 잘하는 일을 즐기게 되면 자신감도 더 충만해지고 세상이 더 행복해지는 법이다.
하버드 대학교 졸업생들을 수십 년간 추적해서 행복감을 연구한 조사 결과에서, 행복감이 높은 사람은 돈이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들, 지인들과 자주 교류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골프를 좋아하는 우리 가족은 가끔 함께 골프 라운드를 하지만, 훗날에는 사위와 며느리 그리고 손자 손녀들과도 함께 하고 싶다. 나와 함께 하는 인생의 동반자들과 서로 편하게 소통하는 그 자체가 행복일 것이다.
인생이 늘 즐겁고 행복할 수는 없다. 쇼펜하우어도 “인생은 고통과 권태를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와 같다”라고 했다. 평생 한 번 하기도 어려운 홀인원보다 가족이나 친구들, 지인들과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현실에 감사하면서 내 삶을 진짜로 사랑하는 것.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지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