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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 May 13. 2022

악성민원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작년 연말에 본부에서 소수의 인원만 참여하여 진행된 정혜신 박사의 특별강연 녹화본을

사내 전산망을 통해서 뒤늦게 시청했다.

대민업무를 담당하는 공공기관의 내부 직원들이 악성민원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고 나 역시도 연례행사처럼 당하는 일이기 때문에 집중해서 청강을 했다.


박사님의 2가지 제언이 매우 격하게 공감되고 또한 인상적이었다.


첫째,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는 다르다.

트라우마의 핵심은 "인간적 모멸감"이다.

악성민원을 대할 때 무조건 들어주고 공감하는 것보다 거기에 쓰러져 피 흘리는 자기 자신을 먼저 구해야 한다. 너만 있고 나는 없는 상황은 절대 없어야 한다. 호소하는 피해에 대해 무한 공감하는 것이지 인간 대 인간으로서 무례를 범하는 것이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뒷배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내부에서 나의 상처가 지지되어야 한다.

내 상처를 누군가는 알아준다는 것이 나를 버틸 수 있게 한다. 민원에 대한 상사의 질책이 2차 가해다.

2차 가해는 사람을 "완전히" 좌절하게 한다.


나는 사실 진상 민원에 강하게 대처하는 편이다.

내 성격 자체가 강하기 때문에 인간 대 인간으로서 무례를 범하는 것에 용납이 안 되는 편이다.

정혜신 박사의 말대로  "너만 있고 나는 없는" 상황은 내게 허용될 수 없다.


내 딸뻘 되는 남자애가 거만한 표정과 삐딱한 말투로 나에게 친절을 운운하면, 친절은 강요하는 게 아니라고 화답한다. 오십이 넘은 나에게 내 딸과 동갑인 여자애가 말끝마다  그쪽, 그쪽이라고 씨부리 싸면 당신만한 딸이 있으니  대화에서의 예의를 지키라고 단호하게 일갈한다. 대학원씩이나 나온 고학력자가 상담사를 개처럼 물고 늘어질 때 대학원씩이나 나왔으면 거기에 맞는 매너를 지키라고 나는  요구한다.


공공기관의 직원들을 조선시대의 노비들처럼 생각하는 그들은, 그동안 먹혀왔던 자기들의 방식이 나에게 통하지 않을 때 그들의 무기를 여지없이 꺼내 든다.


일단, 세금을 거론한다.

마치 이 나라의 세금은 지 혼자 다 내는 사람처럼, 지가 낸 세금으로 월급 받아 처먹는 것들이 우짜고 저짜고를 시작한다. 그 세금 나도 내고 내 동료들도 내는데 말이지. 그 세금을 가장 열심히, 악착같이 받아 챙기는 사람들이 정작 본인들 이면서 말이지.


이어서 한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신문고를 운운한다. 그것이 마치 하늘에서 부여받은 자기들 고유의 특권인 것처럼 걸핏하면 민원을 올리겠다고 한다. 그러면 쫄아서 굽신거릴 것을 기대하는 그들에게 나는 쏘우 쿨하게 화답한다.

네, 그렇게 하세요.


그다음 수순도 정확히 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팀장 나오라고 해!

소장 나오라고 해!

그들은 마치 고매한 척 너 따위 아랫것과 상종 못할 것처럼 굴지만,  결국은 자기 능력으로 해결 못하니 웃전을 찾아대는 것이다. 이쯤에서는 깨갱하고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데 나는 절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 관리자의 직통번호를 다시 한번 쏘우 쿨하게 내어 드린다. 분명한 건, 그들이 원해서지 내가 관리자들에게 보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나는 신문고 민원 따위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민원을 올리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고 권리임을 인정하되, 그것으로부터 나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키는 것 역시 나의 자유이고 권리이다.


그들은 그것이 나에게 엄청난 데미지를 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으나, 단언컨대 그건 그저 그들의 소망일 뿐이다. 물론 경위서를 내는 것 자체에 동료들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이제 8년 차 짬밥인 나는 경위서의 형식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신입 때야 멋모르고 그들이 지멋대로, 철저히 자신의 관점에서 지껄여놓은 글을 읽고 씩씩 열 받으며 조목조목 반박하는 경위서를 냈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그들이 싸지르는 감정 배설물을 단 한 줄도 읽지 않는다.  나의 경위서는 제공된 서식 1장을 넘지 않으며 최대한 간략한 기술로 마무리한다. 잘못한 게 없으니 사과 같은 건 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피력하여 제출한다.


어차피 나의 반박이 그들에게 닿지 않을 것이며, 어차피 "해당 직원에 대해 주의조치 하겠다"라는 정형화된 답변이 그들에게 닿을 것이다. 나는 어차피 그들에게 닿지 않을 글에 조목조목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개 흥분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들이 신문고를 올리고 관리자들에게 불려 간다 해도, 나는 여전히 내 자리에서 건재할 뿐이다.

악성민원은 말 그대로 악성일 뿐이다.

내가 그들의 액션으로 아무런 데미지도 받지 않아서 그들에게 미안할 지경이다.

내가 직장에서 확 짤려버리거나 쩌어기 시골 골짜기로 좌천이라도 되어야 할 텐데 그들의 목적에 부응하지 못해 못내 미안할 따름이다.



하지만, 공공기관에 종사하는 나의 동료들 대부분은 굉장히 나이브하고 유약하다.

동료들은 오히려  나를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해꼬지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쌤~ ㅠㅠ"


하지만 단언컨대, 약자에게 강한 자들은 강자에게 약한 법이다. 내가 강경하게 대처했을 때 그들이 나에게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신문고 민원이 전부인 것이다. 뭐 어디에서는 시너를 몸에 들이부으려고 한 사람도 있었고, 민원인에게 폭력을 당하는 불상사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런 것에 굴복하지 못한다. 최악을 걱정해서 지금 나의 모멸감이 방치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혜신 박사의 첫 번째 제언이 격하게 공감되었다.

나처럼 강경파들이 극소수라는 게 안타깝지만 동료들의 생존 방식을 존중한다. 하지만 트라우마로 피 흘리는 동료들이 있다는 엄연한 현실이 슬프다.



무엇보다 이 강연에서 가장 크게 공감되었던 부분은 상사들에 의한 2차 가해를 지적한 점이다.

나 역시 단 한 번도 관리자들로부터 위로를 받아 본 적이 없다. 어떤 이들은 그저 자기에게 불똥이 튀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지난여름 동료 한 명은 사과하라는 강요까지 받았고,  그녀는 결국 악성 민원인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녀는 굉장히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며칠간 식음을 전폐했다. 그녀가 계약직이었기 때문에 나는 더 속이 쓰렸다.


"잘했어, 아주 내 속이 다 시원하던데!"

나에게 형식적으로라도 이렇게 말해주었다면

나는 이내 몸 둘 바를 모르고 다음부터는 승질 좀 죽일게요, 라며 바로 꼬리를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어떤 관리자도 그런 공감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면 버릇 들어서 더 기고만장해질까봐 걱정이 되는 걸까?


우리는 공공서비스 종사자이지 그들을 가르치거나 훈육할 지위가 아니라고 했다.

싸가지가 바가지인 20대에게 50대가 지적질 좀 하면 정말 안 되는 걸까? 20대가 무례하게 행하는 지적질은 그저 창구 직원으로서 합당하게 받아야 할 수모인가? 나는 여기 직원이기 전에 존중받아야 할 한 명의 인간이고, 20대 성인 자녀가 있는 부모이다. 교육은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도, 학교 선생님들만의 몫도 아니다. 나와 너의 행실이 만들어낸 결과, 거기에서 각자는 교훈을 얻게 되있다 반드시.


어쨌든 공공기관에 오는 사람들은 취약계층이니까 우리가 보듬어야 한다고도 했다. 물론 맞는 말씀이다. 하지만, 부자인 게 권리가 아니듯, 가난 역시 권리도 특권도 아니다. 악성민원은 그냥 악성 그 자체일 뿐이며, 좀비 같은 존재일 뿐이다.

부자든 가난하든, 지금 내 처지가 어떻든 간에 애티튜드는 지켜져야 하고 상호적인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그것은 일방의 것이 될 수 없다.

그 사람이 그런 인성의 소유자가 될 수밖에 없던 불행한 그의 역사까지 이해하고 포용하려면, 나는 그냥 수녀가 되고 말란다.


"관리자들이 직원을 보호하려는 마인드부터가 뒷배 시스템의 시작이다."


이 명제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런 상사는 너무나 귀할 따름이다. 그리고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스스로를 철저히 보호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그 누구라도 예외가 있을 수 없고,  지켜줄 자가 없다면 내 스스로 지키는 수 밖에.


직원들은 모두 자기 자리에서, 자기가 관리하는 민원인들과 대부분 우호적이며, 또한 최선을 다해 민원 및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악성 민원을 당하는 것도 억울할 노릇인데,  99%의 최선이 인정받지 못할 때도 기분은 열나 구리다. 관리자들이 제대로 된 공감을 못하는 건, 바로 그 99%를 보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무시하거나,  셋 중 하나일 것이다.


"선생님, 다음엔 꼭 성공하세요, 다음엔 꼭 죽이고 오셔야 해요"


몸에 칼을 품고서 자기를 고문한 경찰을 20년간 미행하며 복수심으로 버텨온 5.18 피해자가

정혜신 박사님의 저 참된 공감으로 인해 트라우마로부터, 피폐한 삶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뜨겁게 뜨겁게 감동적인 메시지였다.

그러다 박사 말 듣고 진짜로 살인을 실행했으면 어쩌려고 하냐는 주위의 우려에 정혜신 박사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참된 공감이 부리는 마법을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 오늘 악성 민원에 시달렸다면 제발 부탁이건대 그냥 무조건 네가 옳았다고 말해주자.

우리가 정말 잘못한 게 있다면 반성은 그 위로와 공감 위에서 저절로 자라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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