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울적함이 눈에 띄게 심해졌다. 하루 종일 기운이 없고 감정은 물러터진 과일처럼 단맛이 다 빠졌다. 싱거움만 남아 과즙이 아닌 눈물을 흘린다. 그렇다고 내가 울었다는 건 아니고 눈물이 나기 일보직전이었다.
지난주 백화점 라운지 알바 첫 근무 후, 두 번째 근무 날은 첫날보다 실수가 많았다. 오픈 때 청소를 지적받았고 손님 앞에 트레이를 엎고 그 외 자잘한 실수가 오갔다. 과연 내가 근무에 적응을 잘할 수 있을지, 심히 걱정돼 기분이 심상치가 않아 진다. 자꾸만 도망치고 싶어 진다. 그렇지만 그만둘 수는 없다. 그만 두면 모든 것이 어그러진다. 남자친구를 볼 면목도 없어지고 내 커리어에도 금이 간다.
첫날과 둘째 날 먹었던 디에타민-이 약은 나비약으로 불리며 원래는 식욕억제제이나 부작용이 교감신경을 흥분시켜 고양감을 유발한다-은 전혀 효과가 없었다. 상비약처럼 이 주치를 처방받아 첫째 날 두 알, 둘째 날 세 알씩이나 복용했지만 내성이 생긴 건지 내 성에 전혀 안 찼다. 안 먹은 것 같은 효과가 있다면 효과였다.
두 번째 날까지 알바가 끝이 나고 나는 오늘 3.1절 수요일까지, 계속 기분이 한없이 바닥으로 처쳤다. 몸이 밀랍에 감긴 것처럼 굳고 납처럼 무거웠다. 식욕이 떨어졌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알바에 대한 걱정이 3일째 이어졌다. 너무 힘들다. 좁은 호리병에 갇힌 것처럼 생각이 꽉 막혀 답답했다. 엄마는 이 일이 그나마 내가 끔찍이도 못하는 계산이나 정산 일이 없고 메뉴도 간단해 너한테 좋은 일이 아니냐 하는데 맞는 말이다. 내게 좋은 일까지는 모르겠지만 유리한 일일 수도 있었다. 메뉴도 적고, 내가 지독히도 못하는 계산이나 정산이 없다. 그러나 결코 내게 좋은 일은 될 수 없고, 유리한 일도 아니었다. 그만큼 빠른 일처리와 일머리를 요구했다. 나는 일머리가 아예 없다. 손도 느리고 두뇌회전도 빠르지 않다. 경계선 지능 판정은 괜히 받은 게 아니었다. 사회에 나가 일을 다시 해보니 역시 나는 일반인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경지를 극복하는 경지까지 가기로 했는데 극복은 고사하고 경지의 특징만 충실하게 재현해 냈다. 복지관 카페에서의 근무와는 완전 딴판이고 복지관 카페에서 근무했다고 일머리가 는 것도 아니었다. 복지관 카페는, 교육체계로 치면 유치원일 뿐이었다. 사회와는 괴리된 경지들만의 리그인 장소였다.
일을 왜 나는 못할까. 다시 고민이 됐다. 복지관과 라운지 카페에 가지 않는 평일날이면 나는 기분이 처져 바닥에 눌어붙을 지경이었는데 일에서는 극복할 수 없으니까 공연히 화장만 짙게 한다. 누굴 만나거나 할 것도 아니고 화장을 공들여하고 가는 곳은 서점. 책도 대충 둘러보고 동네 백화점 9층(공교롭게도 라운지 백화점과 같은 백화점), 시네마의 홀 내 남은 의자에 앉아 글을 쓴다. 요즘은 글도 잘 써지지 않는다. 감수성이 한껏 예민했을 적에는 시를 즐겨 썼는데 지금 시를 쓰라 하면 쓸 수가 없다. 단편소설도 썼었는데 지금 쓰라고 한다면 역시 못 쓴다. 소설로 이끌어나갈 필력이 내겐 없으니까.
장애도 아니고 경계선 지능이다. 많은 경계선 지능인들이 장애인들처럼 경계선 지능인들만의 일자리도 만들어달라고 청원까지 한다. 나를 포함한 그들은 사회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사회 내에서는 명백히 이것도 장애였다. 하지만 경계선 지능의 범위를 한정할 수 없고 눈에 띄게 장애도 아닌 그들을 규정할 정의도 없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어차피 장애랑 한 끗 차이일 뿐이니 차라리 장애 판정을 받을까 까지도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명확히 부정 수급이었고 지금 생각하면 장애판정은 평생의 인생 낙인이었으므로 생각을 접은 게 다행이다. 장애 판정을 받으면, 복지가 적용돼 그나마 안정적 생활은 지속해 나갈 수 있을지언정 장애인라는 정의로 규정되고 아예 법적으로 일반인들과 구분된다. 게다가 그냥 장애인도 아니고 '지적장애인'이 되는 건데, 이렇게 되면 얻는 것보다 잃은 게 많아진다. 그냥 애초에 사리분별도 안 돼 정말 지적장애 판정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면 모르지만, 일반인들 사회에 속해야 하고, 멋진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하고 남들로부터 인정도 받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거라면 지적장애 판정은 그 모든 삶으로부터 산산이 벗어나는 것이다. 지적장애가 되면, 사랑도 할 수 없고 일반 사회에 속할 수도 없으며 인정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 생각이 옳은 가 하면 이건 검증이 필요하겠으나 내 생각은 그렇다. 특히나 나처럼 인정 욕구가 강하고 열등감이 남다른 사람에게 지적장애 판정은 바꿀 수 없는 열등감을 낙인 하는 꼴이 된다. 말 그대로 지적으로 장애가 있다는 뜻이니까.
오늘 하루도 나는 패배감에 휩싸였다. 경계선을 탈출하고 일반인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내 극기의 심정이 알바 하나로 무너져 내린다. 일반인들의 속도를 도저히 따라가기 힘들다는 쓰라린 아픔만 깨닫고 그런 깨달음을 느끼는 내 자신이 처량했다. 갑자기 남자친구에게 멸시를 당하고 바닥으로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진다. 내가 받고 있는 뜨거운 사랑이 천대와 찬밥으로 바뀌는 것은 지적장애와 경계선의 차이보다 한 끗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다. 무시와 멸시라고 생각한다. 경계선 지능, 너무 많은 멸시의 시선이 여론으로 게시되고 있다. 그 멸시의 시선에 남자친구도 있을 거란 생각만 하면 갑자기 불안으로 떨렸다. 치가 떨린다는 느낌이 이런 느낌일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더 큰 불행과 파국의 국면으로 흐른다. 절망. 이런 걸 절망이라 부를 수 있다면 주저 없이 절망이라 부를 것이다. 나는 지금 절망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