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다고 욕하지 마세요
느릴 뿐 멈추지 않고
꾸준히 걸어가요
모두가 빠르게 달려가지만
느린 걸음 한 발짝 두 발짝
그대들이 짓밟고 뛴
들꽃을 피해
선하게 나아가죠
우리는 느린이
느리고 또 느린이
느리지만 찬찬히
포기 않고 꿋꿋이
향해가요.
이 거리 당신과 함께
빨리 가라 재촉하지 마세요
우리의 속도로 포기 않고
착실히 걸어가요
뛰어가다 넘어지고
뛰어가다 멈추는,
그대들의 저 끝 뒤에서
우리는 주저 말고
진하게 나아가죠
우리는 느린이
느리고 또 느린이
느리지만 계속
끊임없이 지속
향해가요
이 거리 당신과 함께
우리만의 속도로
천천히, 오롯이
끝까지 가요
당신과
이 길의 끝에서
다시 만날 그날까지
끝까지 가요
멈추지도
포기하지도
주저하지도
않고
속도는 달라도
같은 지점에서
다시 만날 그대들과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모두가 함께 가는
세상을 향해
우리 다 같이
다른 속도
같은 한마음으로
향해가요
우리는 느린이
느리고 또 느린이
느리지만 기특하게
느리지만 애틋하게
향해가요
이 경주의 끝을
당신들과 우리가 함께
느리다고 하지 마세요
행복은,
어차피 빨리 오지 않아요
남들보다 느리다는 판정과 수치로 증명된 기정사실 앞에 경계선 지능임을 드러내놓고 글을 쓰는 이 마음을 뭐라 불러야 할까. 타오르는 열정일까 순수한 흥미일까 아니면 굳은 신념의 의지라고 할까 그도 아니면 글로써 얻는 성취를 바라는 걸까. 깊이 고민해 본 적 없어서 잘 모르겠다. 경계선 지능 자체를 치열하게 고민해보지 않았다. 경계선 지능임에서 출발하는 처절한 문제의식도 아니다. 나는 오히려 경계선 지능을 부정하고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쪽에 가깝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희미하지만 확실한 빛. 내가 글을 쓰는 마음을 표현하자면 여기에 가깝다. 어떤 확실한 형태로 굳어졌다기보다는 색채나 빛에 가까운 어떤 것. 뭐라 설명할 수 없이 미약하고 희미하지만 확실한 느낌. 감이 안 잡히지만 그 자체로 감인 것이 쓰는 내 심정이다. 토로하고 분출하지 않고 조용히 쓴다. 쓴다는 행위는 느린 행위이다. 빠른 인상과 감각을 요구하지 않고 차분하고 지긋하게, 느린 나처럼 느리게 흐르는 템포다.
느린이. 느려서 느린이. 현대 사회의 어른처럼 빠르지 않고 어린이의 인생처럼 느려서 느린이다. 참 내놓아 놓고 보니 못났다. 못난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느린이라고 하고 싶다. 느린 게 못 난 건 아니지 않나. 빠른 것, 신속한 것이 현대와 현재의 미학이자 필수라고 할 수 있지만 날 때부터 빠른 사람은 없다. 어린이부터 시작하는 게 인간이다. 뛸 수 있게 되기까지 느린 걸음이 있었고 느린 걸음 앞에 더 느린 걸음마가 있었다. 빠름은 학습된 것이다.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로의 진입을 위해 사회화 과정에서 단련한 습성일 뿐이다. 우리는 빠르게 달리는 법을 습득한 것이고 모두가 빠르게 달리다 보니 모든 게 빨라진 것이다.
빠른 건 좋은 걸까. 인생이 거대한 레이스의 한복판이고 사회가 그 레이스의 운영 주체로서 누구보다 빨리 결승선에 도달하는 게 승패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면, 순위를 나누고 빨리 도착한 자들에게 상금이 주어지는 방식이 우리의 전부가 될 것이다.
빠른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느린 자들이 되는 세상은 멀미 그 자체이지 않을까. 느리지 않기 위해 빠름을 선택한 이들의 앞 다툰 치열함에 나가떨어지는 자들이 생길 것이다.
느릴지언정 이탈되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빠르게 달리다 나가떨어진 것은 아예 경주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임으로 느리지도 못한 게 된다. 그렇게 뒤떨어져 버린 자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실패를 맛본다. 느린 자 뒤의 느린 자가 되거나 탈주로 실격되거나로.
빠르게 달리다 탈이 나 구토를 할 수도 있다. 치열함의 끝은 열렬함임으로 우리는 격렬하게 열렬해진다. 순위권으로서 주어지는 상금에 대한 성취를 열렬히 바라고 무리하게 달리다 제 속의 것을 게워내 넘어져 일어설 수도 없어진다. 그 열정은 결국 끝도 없어 정서적 멀미를 일으킨다.
이 레이스의 끝은 결국 끝장이다. 모두가 끝장을 봐야 끝이 나는. 순위와 상금. 성취 아니면 실패. 빠름 아님 도태. 그 사이에 결과나 느림은 없다. 누가 이 레이스의 룰을 정했는지
누가 토끼가 되고, 누가 거북이가 되거나 거북이로 전락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그런 건 중요하지 않게 된 지 오래다. 둘 다 이 레이스의 규범에서 흥미가 없어진 지 오래다.
이 레이스, 경주 장내의 느린이로서 내가 달리기보다 쓰기를 선택한 이유, 그 이유는 도저히 빠르게 달릴 수 없어서 이기도 하고 느린 자로 도태된 바에 속도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빠르기 시작하면 느리지 않기 위해서 계속 빨라야 하지만 느리기 시작했다면 느려도 된다. 느리다 보면 역설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 더 정확히는 보지도 않고 스쳐갔던 것들이 보인다. 어쩌면 벚꽃 만발한 봄길이었을지도 모를 레이스 밖 경치들이 비로소 아름다워진다. 성취나 순위와는 무관하지만 순수하고 예쁜 것들이 중요해진다. 이미 뒤떨어져 느린이가 된 자신은 이미 잃을 것이 없어지면서 잃을 것이 없으니 수많은 잃을 것들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상금은 없고, 경주에서 밀려난 현실은 어려운 생활로 나타나지만 그래도 별 수 없다. 빠를 수는 없기에.
그 어려운 생활, 경주에서 밀려난 현실 속에서 쓰기라는 도피가 새로운 대안, 새로운 빛으로 떠오른다. 걷는 속도와 호흡과 비슷한 쓰기를 통해 나는 레이스를 이탈하고 자유로워졌다. 자유는 아니고 내 안에서 피어오르는 빛이라고 말하지만 그 빛은 자유롭고 열정적이며 의지로 가득 차있다.
레이스를 뛸 수 없다면 쓰면 된다는 생각. 이 생각이 나를 흰 사막 같은 지면으로 이끈다.
인생과 사회가 돌아가는 판을 보며, 아니 쓰며,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본다. 모두들 처절하게 치열하고 열렬하게 열정적이며 순위권에 들고, 결승선을 통과해 성취를 거머쥐기도 하지만, 어쩐지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빠를수록 느껴지는 감정은 쫓기고 있다는 감각. 세상의 결승선과 가까워지면 행복과도 가까워져야 하는데 이 세계의 결승선과 행복은 지점이 다른 것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인가.
빠르다고 행복이 오지 않는다. 느리다고 행복이 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행복은 빠른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빠르든 느리든 결국 결승선이란 지점에 도착하는 것은 같다. 인생은 빠르든 느리든 태어나고 죽는다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각자의 속도가 있다. 그 속도는 빠른 것에도 느린 것에도 속하지 않는 고유의 속력이 있다.
마라톤이나 모든 경주가 그렇듯이, 누가 빨리 결승선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뒤따라오는 자들이 모두 도착할 때까지 경기는 끝나지 않는다. 제일 일찍 온 자든 가장 늦게 온 자든 한 지점에서 만난다.
다 함께 자기만의 속도로 천천히 뛰어 다 같이 결승선에 도착해 상금을 나눠 같을 수 있는 사회를 가정해 본다면 이 자본주의 사회에 너무 불온해 보일까? 개인의 속도를 인정하고 모두가 다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 상대적 순위가 아니라 각자만의 고유한 순위로, 모두가 제각각의 크기의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세상을 대안으로 떠올려본다. 상금의 파이를 공평하게 나누자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이라도 모두의 몫이 있어야 한다는 걸 말하고자 함이다.
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것도, 내가 뜀이 아닌 씀을 선택했기에 가능하다. 문제의식을 던지려고 쓴 글은 아니다. 그저 내 안의 빛에 따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나는 느린이니까. 천천히, 차분하게, 착실하게, 써보는 것이다.
느린이. 올곧은 길이 아닌 경계를 '걷는' 느린 선수로서 쓰고 쓴다. 명확한 형태 없이 새어 나오는 빛이 나를 글로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