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는 백년손님 PART1] 아내는 이제 시댁에 가지 않는다
어느 해인가의 추석 명절이었습니다. 저희는 부모님 댁에 갔지요. 누님은 시댁에 갔다가 친정에는 오후에 오기로 했습니다. 저희는 아직 처가로 출발을 못 하고 누님 식구가 오면 같이 술 한잔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서로 작은 응어리는 있었을망정 큰 문제는 없어 보였습니다.
결혼은 제가 먼저 했고, 누님이 나중에 결혼을 했습니다. 누님과 아내는 동갑입니다(저는 두 살 어린 연하의 남편입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처음부터 말을 놓더군요. 그때는 누님이 아직 미혼이라 별문제가 생기지 않았고, 둘 사이의 금이 간 것은 누님이 결혼을 하는 순간부터였습니다. 부모님 입장에서 남매가 서로 ‘비교’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날 매형은 피곤해서 다른 방에서 자느라 누님과 저 그리고 아내, 셋이서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명태전, 소고기 적, 삶은 닭, 나물, 나박김치 등 명절 음식을 안주 삼아 시작한 술자리였습니다. 처음엔 화기애애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누나와 아내의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일이 터진 이유는 ‘비빌 언덕’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결혼할 때는 부모님 수중에 돈이 없으셔서 신혼집을 구하는 데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처가에서 받은 보증금으로 달과 가깝다는 산동네의 전셋집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5년 후 누나가 결혼할 때는 부모님께서 적은 금액이지만 전세 자금을 지원해 주셨습니다. 거기에 매형이 얼마를 더 보태서 집을 얻었습니다. 아내가 억울해하는 건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겐 한 푼도 지원해 주지 않으셨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우리 어렵게 시작했잖아.”
“우리보단 낫지 않아? 우리는 시댁에서 한 푼도 안 받고 시작했는데?”
누님 입장에서 어렵게 시작했다고는 했지만, 아내는 조금이라도 ‘비빌 언덕’이 있지 않았냐는 말이었습니다. 우리가 결혼할 당시 아버지 연세가 55세, 어머니 54세이셨고, 전세집 하나뿐 노후 준비는 안 되어 있어서 생활비 안 보태드리면 다행이었습니다. 꼭 바라서가 아니라 결혼 초 어려운 살림에 심리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던 건 사실입니다. 게다가 이 일이 있기 전 아내가 상처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퇴사하고 창업한 매형의 사업이 승승장구를 해서 누님 가족이 잠실 아파트에 입주하게 되었고, 어머니와 아내가 그 집에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얘야, 인테리어 참 좋다.”
“아, 네 어머니.”
“쟤(누님)가 시집와서 사위가 잘 풀리네. 이런 집도 오고 얼마나 좋니?”
“어머니, 그럼 아들이 잘 안 되는 게 제 탓이란 말씀이세요?”
아내가 말하길 이때 처음으로 참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로 쌓이고 쌓인 상태에서 시누이까지 서운한 마음을 몰라주니 두 사람의 대화는 점점 싸움으로 바뀌고 말았지요. 중간에서 난감해진 저는 그 순간이 천만년이나 내려오는 지긋지긋한 싸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만하라’는 제 말은 둘 사이를 지나는 화살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 한 마디는 과녁을 찾지 못한 채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에게 그 순간 저는 투명 인간이었습니다. 순간 화가 치민 저는 상을 뒤엎었습니다. 저의 존재를 드러낼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요. 제 생에 상을 뒤엎은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싸움은 멈췄고 누님은 방을 나갔습니다. 훗날 아내 말이 시누이가 나가고 나서 자신은 어질러진 방을 치우려고 걸레를 집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그냥 팽개치고 다른 방으로 갔고 결국 어머니께서 치우셨답니다.
이로 인해 누님과 아내는 처음으로 거리가 생겼습니다. 물론 부모님도 말씀은 없었지만 팔이 안으로 굽지 밖으로 굽진 않잖아요. 결국 시부모의 문제는 시댁 전체의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그때 유난히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쩌면 그때부터 저는 셀프효도를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