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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날 Apr 21. 2022

내가 가족을 지키고 싶은 이유

​[며느리는 백년손님 PART 1] 아내는 이제 시댁에 가지 않는다

매형은 결혼 후 자신이 다니던 회사를 나와 창업을 했습니다. 성실하고 성격도 좋아서 그런지 사업은 승승장구했고 잠실 아파트에 입성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누님과 저희는 누가 봐도 차이가 났습니다. 누나와 매형이 잘 나가는 동안 저희 형편은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때 저는 직장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면서(제 의지와 상관없이 직장을 나와야 하는 이유가 생겼습니다.) 수입이 불안했고 첫아이를 키우기 위해 퇴직한 아내도 더는 버틸 힘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 결혼식 청첩장을 받고서 지갑을 열어보니 천 원 한 장이 있었습니다. 저는 끝내 그 친구 결혼식에는 가지 못했습니다. 축의금도 없이 갈 수는 없었으니까요. 결국 우리 가족은 따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아들을 데리고 부모님 댁에, 아내는 딸을 데리고 집(장모님이 빌려주신 다세대 주택)에 남았습니다. 아들은 초등학교 3학년, 딸은 4살이었습니다. 처음엔 딸도 제가 데리고 살았습니다. 아내는 새 직장을 얻어서 출근해야 했으니까요. 장인은 돌아가시고 장모님만 계셨는데 그 당시 장모님은 둘째 형님의 아이들을 돌봐주고 계셔서 저희 딸을 맡아주실 수 없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딸은 유치원에 적응을 못 했습니다. 유치원에서 돌아와서는 부모님께서 돌봐주셨는데 우리 부모님은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모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에서 생활하셨고 어머니는 인형 봉제공장에서 일하시느라 밤늦게 돌아오셨습니다. 누나와 저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까지 혼자이거나 둘이 생활하는 게 거의 일상이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특히 토요일(그 당시에는 토요일에도 등교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으며 TV 야구 중계를 보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버지께서는 한국에 돌아오신 후에도 일하시느라 거의 집에 안 계셨고 어머니는 그 무렵 동네에서 작은 치킨가게를 하시느라 바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어렸을 때 빼고 초등학교 이후로는 온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이 거의 없습니다. 사진이라는 건 사이가 좋을 때 찍을 수 있는 건데 돌이켜보면 저희 집은 늘 긴장 속에 있었습니다. 특히 아버지께서 일 끝나고 술을 드시면 늘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꾸준히 싸움의 횟수가 늘어났고 점점 강도도 세졌던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이 손녀 키우는 법을 알기란 어려웠겠지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아내에게 얘기해 결국 딸을 장모님께 맡기게 되었습니다. 짧게 끝날 줄만 알았던 이 생활은 10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제가 꿈꾸던 결혼 생활, 행복한 가정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저에게는 어려서부터 품고 있던 ‘언젠가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겠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물론 ‘원하는 삶’이 조금씩 바뀌긴 했지만 ‘1년에 한두 번 가족여행을 다닐 정도의 여유를 가지며 건강하게 사는 것’이라는 기준은 변함이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지금은 ‘우리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행을 다닐 정도의 여유는 조금 시간이 걸릴 듯하겠지만 그 신념은 여기까지 저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있어서 제가 사업이 어려워졌을 때 부모님께서 금전적인 도움을 주셨습니다. 매우 감사히 생각합니다. 여전히 넉넉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아니까요. 마음 아픈 일이지만 그 당시 아내는 저와 헤어지기를 원했습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시댁과의 고부갈등에 남편은 수입이 불안정하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아내가 전하는 말 중에는 장모님 친구분들이 아내를 중매해주겠다며 공공연히 말씀하셨다 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더욱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은 아내와 제가 서로를 미워해서 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서로가 사랑보다 미움이 커서라면 모를까 돈이 없어서 또는 부모가 반대해서 헤어진다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고, 고부갈등은 내 가정을 포기할 이유가 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놈의 상황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며 우리를 여기까지 몰아붙였다는 것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더는 저항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운명도 자신의 임무가 있을 테니까요. 저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견디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제가 오랜 시간을 견뎌온 데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습니다. 우리는 부모로서 자녀를 낳고 기르는 선택을 했지만, 자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가정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황당한가요. 적어도 자녀의 권리는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부모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독수리도 새끼가 둥지에서 뛰어내려 날 수 있을 때까지는 내치지 않고 품어주지 않던가요? 다만, 그 책임이라는 것이 아이가 안전하게 생존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책임만이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아이들이 가정 안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에 대한 책임이 훨씬 크게 다가왔습니다. 사실 저 또한 이 부분에서 매우 부족한 상황에서 자랐기 때문에 내 자식에게는 더욱 지켜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불행한 결혼을 보면서 내 가정은 더 나은 가정으로 만들겠다고 항상 다짐했습니다. 보통은 부모를 닮는다고 하지만 경험해 본 바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꽤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물론 달라지려는 의지와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자녀를 케어하는 일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아들은 성인이 되었지만, 딸은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부모로부터 소속감과 애정이 충족된 아이들은 성인이 된 후엔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둥지를 떠나겠죠. 몸과 마음의 둥지 모두 말이죠. 늦어도 결혼 후에는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까지는 지난 ‘이별 10년’의 시기를 와신상담으로 삼고 이 둥지를 굳건히 지키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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