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맡겨진 곳은 안양시 만안구의 대우아파트였다. 당시에는 (주)대우라고 하면 그래도 좀 알아줬다. 내가 맡겨진 집의 가장, 즉 이모부님은 대우에 다니시는 분이었다. 성실하고 무뚝뚝한 분이었다. 어찌나 근엄한지 그 무게감은 집안 곳곳을 내리눌렀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 먼저 뭐라도 잘못했다고 말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모님은 그래도 살가웠는데 내 편 같지는 않았다. 나는 알건 다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 것이 싫었다.
'절 키우는게 부담스러우시겠죠? 언니가 원망스러우시죠? 머리검은 짐승은 들이는게 아니라고 그랬는데 키 170의 중학생이라니요. 사촌동생들한테 나쁜 영향을 줄까봐 걱정되시죠?‘
나는 잔뜩 꼬여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입밖에 꺼내는 것 대신 나는 일체의 용돈을 받지 않기로 결심했다. 사실 아예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통학이 완전히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최소한의 것만 받고는 무엇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친구들로부터 쓴 소리를 좀 들어야했다. 체육시간이 끝나고 우루루 매점에 몰려가는 것은 당연했는데 거기서 나는 피자빵도 이프로도 구매할 수 없었다. 친구들은 내 사정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또 친구들이 이해해줄만한 단서도 나는 주지 않았다.
"진혁아 넌 안 사먹어?"
희성이는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안 사먹으면 따뜻한 피자빵을 나눠줘야할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사 먹으라고 유도하는 것이었다.
"괜찮아 나는 원래 간식 잘 안먹어."
나는 철처하게 내 형편을 숨겼다. 아무도 몰랐으면 했다.
"에이 그래도 한 입 먹어."
희성이는 강권하듯 내게 피자빵을 들이밀었다. 이기심과 사회성에서 사회성이 이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에 이골이 나 있었다. 아무리 이런 친구들이 남자답게 호기롭게 말해도 내가 그것을 덥썩 받아 물면 안된다. 이런 일이 세네번 이어지고 나면은 내게는 안좋은 소문이 돌기 마련이었다.
"아 진짜 괜찮아. 곧 점심이잖아."
나는 희성이가 콩 한쪽도 나눠주는 근사한 우정의 실천으로 충분할 것인지, 아니면 피자빵 1인분을 혼자 다 먹지 못한 것에 대한 앙금이 조금씩 쌓이는 유형의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작은 가능성이지만 희성이가 진심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피자빵이 아닌 다른 것으로 희성이의 진심을 확인하고 난 다음에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날 6교시는 수행평가였다. 간단하게 답을 쓰면 되는 것이었는데 답란에 오기를 하였다. 볼펜으로 적어서 수정테이프가 필요했는데 문구류 중에서는 비싼 편이어서 항상 앞자리 정식이한테 빌려써야 했다.
"저기 정식아 화이트 좀 빌릴 수 있을까?"
"...."
시험이라 내가 너무 작게 말했는지 정식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못 들은 척 했을 수도 있었다. 나는 종이를 살살 긁어서 답안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매우 진하게 글씨를 덧입혔다.
하교길은 항상 고통스러웠다. 이모님댁은 큰 개천이 있고 건너편에 양명고등학교가 자리잡은 곳이었다. 만안구에서 관악구 봉천중학교까지는 9-3번 버스를 타고 1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였다. 출퇴근 시간이라 때로는 2시간이 넘게 걸릴 때도 있었다. 안양시 만안구에서 서울시 관악구로 들어오는 버스는 9-3 외에는 대안이 없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대안이 없기로는 나와 마찬가지여서 그 버스는 늘 콩나물시루와 같이 비좁았다. 당연히 앉아서 갈수도 없었고 내게는 등하교가 가장 큰 스트레스의 원인이었다. 학교에 도착하면 이미 지쳐있고 하교하면 잘시간인데 학업에 집중하라는 것은 허황된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가능성을 보았다. 그 가능성이란 희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철학자나 사회학자가 되고 싶었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하려면 노력보다는 어려운 환경 중 어떤 유형인지가 더욱 결정적인 요소였다. 등하교로 인해 하루에 4시간을 날리는 것은 분명 힘든 환경이지만 하루종일 소주잔을 기울이는 아버지가 있는 단칸방에서 책을 펼치는 것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았다.
"진혁아, 학교 잘 다녀왔니. 오늘은 별일 없었고?"
다정하게 맞아주시는 이모님을 보면서 내가 앞서 선량하지 못한 마음을 가졌던 것이 후회되었다. 친인척의 자녀를 갑작스럽게 수습하게 된 이모님도 위로를 받아야할 상황인데 나만 위로받아야 할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더 슬픈 일은 이모님도 나도 서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더 상처가 커지는 관계라는 것이었다.
"네 잘 다녀왔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런 문제없어요."
내가 내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처럼 이모님도 그랬다. 하루는 이모님과 저녁 식사를 하는 중 자연스럽게 켜져있는 텔레비젼에 눈길이 갔다. 그 전에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연속극의 중간 회차가 방영되고 있었는데 10분만 보아도 전체 줄거리가 머릿속에 그려질만큼 전형적인 한국형 신파 드라마였다.
"내 진짜 엄마도 아니잖아!"
주인공이 소리친다. 아뿔싸. 알고보니 입양된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였다. 드라마 속 주인공의 어머니가 선의로 꺼낸 말에 주인공은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 때 마침 이모님이 말을 꺼냈다.
"이거 식탁보 갈 때가 됐나? 끝이 누렇네."
이모님이 가리킨 식탁보는 괜찮아 보였다.
확실히 드라마와 현실은 다르다. 이전 세대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워낙 다양한 상황을 미디어에서 계속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처해진 상황을 미디어에서 한번쯤은 마주칠 수 밖에 없다.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인지하고 의젓하게 소화해낸 줄 알았다. 하지만 사회복지학 용어로 말하면 똑같이 상처받고 있는 요보호대상자 중의 한명이었다. 제 안에 엄연히 존재하는 것을 모른 체하는 행위가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내가 감정 표현을 못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보고싶다. 고맙다. 사랑한다. 이런 말이 머릿 속에서만 맴돌았다. 특히 무엇보다도 슬프다는 것은..
훗날 중앙가정위탁센터의 위원으로 일할 때 새로 도입될 학교 복지프로그램의 명칭을 정하는 일로 사회복지학과 교수와 사범대 교수가 싸우는 것을 목격했다.
"사업명을 WE로 하면 어떻게 합니까? 교육 정책인데 당연히 Education이 먼저 들어가야지요. 어떻게 Welfare가 먼저 들어갑니까."
"가정이 바로서야 학교생활도 이뤄지는 겁니다. 그리고 EW라는 단어를 어떻게 발음하실겁니까?
"누가 WE 아니면 EW로 하자고 합니까. 새로운 이름을 지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수님이 한번 직접 지어보시든지요."
여러 과정을 거쳐 위스타트 사업은 2004년 발족하였고 현재는 취약계층 아동이 공평한 교육과 발달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정부에서 맞춤형 통합 서비스를 지원하는 사업으로 이어져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