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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혁 Apr 11. 2022

3개의 아르바이트 -4-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나는 돈을 모아 공부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르바이트 3개를 해도 식비랑 월세를 빼면 저축하기에는 너무 빠듯했다. 1년만 공부한다고 해도 3년을 모아야하고 2년이 필요하다면 6년을 모아야했다.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는 셈이었지만 우선은 일을 시작했다. 그외에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주유소는 숙식까지 해결할 수 있는 특이한 형태의 아르바이트였다. 주유소에서 일하면 월세를 아낄 수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겨울철 주유소 일은 지극히 고통스러운 곳이었다. 아무리 두껍게 입어도 새벽에 1시간만 밖에 서있으면 손발과 안면에 감각이 사라졌는데 8시간을 서서 일했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숙박을 해서 생활비를 아끼면 좋았겠지만 실제로 다녀보니 주유소 생활은 가출청소년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변화보다 더 큰 변화를 수용해야 하는 일이었다.

 호프집에서 내 역할은 주로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었다. 손님이 아주 많으면 서빙도 하지만 대부분 테이블을 치우고 음식물 쓰레기를 분류해서 드럼통에 모으고 통이 다 차면 그걸 다시 밖에다가 갖다 버리는 순서의 반복이었다.


 "어머나 저 사람봐."

 "여기선 저렇게까지 일을 시키는거야?"

 그러던 어느 날 한번은 드럼통을 들고 지나가다가 그만 홀에서 엎어뜨리고 말았다. 뚜껑이 열린 드럼통에서는 맹렬한 속도로 내용물이 새어나오고 있었고, 이 역겨운 내용물이 홀바닥에 모두 쏟아지면 하루 영업은 나 때문에 망할 것이 분명했다. 한 1/4 쯤 쏟아졌을 때 난 몸으로 드럼통 입구를 막고 팔로 바닥에 흐른 내용물을 쓸어담기로 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우웅,우웅, 우웅"

 나는 내 목으로 소리를 내어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구체적으로 들리지 않도록 길게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다.


  일 할 수 있는 곳은 제한적이었다. 주유소, 피시방, 호프, 만화방, 편의점, 물류창고. 이 시기에는 육체적인 부분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내 삶이 어떤 안 좋은 케이스의 전형적인 루트를 밟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적절한 계획성이 뒷받침되면 2~3년 후 검정고시를 보고 기숙사형 종일반에 등록하여 친구들보다 그다지 늦게 않게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와 약속한 시간은 속절없이 지나갔다.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생기기 시작했다. 모든 일을 직접 꼭 해보고 나서야 깨닫냐며 질책했던 주유소 사장님의 나에 대한 판단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아픈 이를 부여잡고 버텨야 얼마간이라도 돈을 모을 수 있었는데 그렇긴 해도 결국 치료를 받긴 받아야했고, “진작 왔으면 이렇게까지 비용이 나오지 않았을텐데요.” 라는 치과의사의 핀잔을 듣는 일을 두 세 번 반복하고 나면 잔고가 남아있을 턱이 없었다.


 그 때 내 손을 잡아준 것이 동영상 제작이었다. 도서대여점은 괜찮은 환경이었다. 시급은 상대적으로 낮았지만 야간에는 손님도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 카운터에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준수 선배의 어깨너머로 배운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연마했다. 도서대여점의 카운터 PC에서 탄생한 내 첫 작품으로 만원짜리 문화상품권 열장을 손에 쥐었다. 단순히 상금에 혹해 시작하게 되었지만 도서대여점에서 몇 달을 준비해 나간 첫 대회에서 입선하게 되었을 때의 그 기쁨은 경제적 가치로만 판단할 수가 없었다. 이 상만이 전형적인 중졸 남성의 인생 경로에서 유일하게 차별화가 될 수 있는 지표였다. 기권할 뻔 한 내 삶을 지켜준 것은 ‘대덕대 디지털 영상 공모전 장려상과 ‘SK 콘테스트21 플래시 애니메이션 특별상‘이었다. 상품으로 받은 디지털 카메라는 돈을 받고 팔아버렸다.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경험을 좀 더 쌓은 2년 뒤에는 부산 비엔날레 국제 디지털 애니메이션 공모전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그렇게 한 동안은 의기양양했지만 결국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인생이란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부산 벡스코에서 성대하게 열린 국제 부산비엔날레 시상식에서 나는 당당하게 1등의 자리에 섰다. 수상자 테이블에서 다른 분들과 통성명을 해보니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 정규교육 과정을 밟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홍대 미대 학부생, 홍익대 대학원생.. 서울대 미대생, 숙대생 등. 내가 당선된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난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들에 비해 난 배경도 배움도 없는데 실력으로 승부 볼 수 있었다. 대한민국은 그런 세상이구나,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구나. 하지만 실제와는 달랐다. 코리끼 다리를 짚고 전체를 가늠했던 것이다.


 부산에서 돌아오자마자 백군데 넘는 곳에 입사원서를 넣었으나 정규직으로 날 받아주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내 실력이 실제로 기능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해도 나는 그 일을 맡을 수 없었다. 서류상에서는 최저학력 기준 때문에 탈락한 곳이 대부분이었다. 다시 나의 원래 삶의 패턴으로 돌아갔다. 아르바이트 3개.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건강이었다. 나는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고 있었다. 잠 잘 시간은 부족했고 믹스 커피를 달고 살았다. 한계였다. 너무 오랫동안 무시를 한 나머지 아르바이트 도중 갑자기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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