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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후 Aug 17. 2023

편견을 벗고 비움의 미학 속으로

짓푸른 바다의 고래를 다독인다

천명관의 '고래'를 읽고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다. 춘희와 같은 감방에 있던 청산가리는 시난고난한 삶에서 해탈한 듯한 말을 했다. 죽음이란 건 별 게 아니라 그저 먼지가 쌓이는 것과 같은 일일 뿐이야. 삶과 죽음은 태초부터 있던 먼지와의 동거란 것일까. 어찌 보면 심오하고 또 별 거 아닌 듯한 끝없이 상실해 가는 게 인생이기도 하다.


세상에 태어난 지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뀐 후에야 2023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로 선정된 고래의 특별판을 읽었다. 극장을 시작으로 대 서사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예수도 아닌 춘희는 마구간에서 태어난다. 그녀가 사람의 목소리보다 자연의 소리에 더 친근한 것은 어쩌면 탄생의 순간부터 예견된 것인 줄도 모른다.


담담하지만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자연과 코끼리와의 텔레파시로 교감하는 춘희이다. 그가 벙어리가 된 것은 세상과의 단절 같지만 줌 인해서 보면 더 큰 흙, 물, 바람 등과 같은 대자연과 더 깊은 연대를 형성한다. 탯줄로 연결된 모성은 그녀를 살피지 않았지만, 대자연은 그녀를 돌봄 했고 사후까지도 마무리를 했다.


책의 제목이 왜 고래일까. 춘희의 엄마인 금복은 동생을 출산하다 죽었다. 어른들은 납빛으로 굳었고 안기고픈 엄마는 이불에 덮였다. 그녀는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게 된다.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바람이 분다는 명목으로 도망친다. 그녀가 떠난 자리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남았다. 그러다 바닷가에서 거대한 물을 뿜는 푸른 고래를 만난다. 고래에게서 금복은 죽음을 이길 영원한 생명이란 이미지를 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포획된 신비한 고래는 잘게 잘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야 만다.


이 책은 금복, 춘희, 국밥집 노파 등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서술한다. 인물의 감정 묘사보다는 스토리로 풀어내면서   무성 영화의 변사처럼 독자에게 말을 건다. 생뚱맞다고 하기보다 더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하는 작가의 의도라면 대성공인 듯하다. 슬쩍슬쩍 지루할까 봐 소설 뒷이야기를 암시하기도 하면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잡아 끈다고나 할까.


얽히고설킨 이야기가 나오지만 마지막을 향해 갈수록 수렴되면서  인과관계가 드러난다. 그러나 흔한 권선징악은 식상하다. 우리 삶도 전래 동화처럼 권선징악이나 정의가 실현되면 시원한 사이다를 들이켠 듯 후련하다. 그만큼 우리는 착한 이가 잘되길 원하고 아픈 일들을 겪으면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되돌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고래에서는 야생과 문명이 공존한다. 또한 여성성과 남성성이 혼재되고 죽은 자가 환상처럼 현존하며 아름답게 버무려진다. 금복이 수련에게서 뭘 잃었는지 깨달으며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면서 여성을  깨뜨린다. 스스로 남자가 됨으로 여자를 넘어서지만 자연을 거스른 대가를 받는다. 이전의 당당한 여장부의 모습 대신 이기심과 치졸한 복수심으로 가득한 사내의 모습으로.


그에 반해 세상의 욕심이나 편견 따위는 모르는 춘희는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모진 세월을 겪는다. 십 년 만에 감옥에서  풀려난 그녀는 자연으로 돌아와 아무도 없는 평대에서 끝을 향해 가면서 고독해진다. 그럴수록 그녀의 벽돌은 훌륭해진다. 그 장인정신을 녹여낸 벽돌은 사후에 뛰어난 건축물로 거듭난다. 그 건축물이 무너지지 않는 한 그녀의 혼은 죽지 않을 것이리라.


지상에선 긴박한 순간에도 나오지 않던 목소리를 평생 친구인 코끼리 점보의 등에 업혀간 우주에서 춘희는 자신에게서 흘러나온 목소리를 듣는다.

 '여기는 아주 고요해'

그녀와 점보는 사라지지만 누군가 기억한다면 존재한다고. 이는 사자의 서와도 일맥상통한다. 결국 무로 돌아가는 죽음이다.


고래를 읽고 싶다면 도전해 보길 권한다. 워낙 몰입도가 강한 소설이지만 더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팁을 주고 싶다. 이 소설에는 수많은 법칙을 알려준다. 지식인의 법칙에서부터 토론, 중력, 신념 심지어는 구라의 법칙까지 찾는 기쁨을 누려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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