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하고 순수한 자연과 동심은 어쩌면 한 프레임 안에 있어야 할 동반자일지도 모른다. 물론 도시에 동심이 한 컷에 있다 해서 순수하지 않다고 치부할 수 없다. 다만 순수하다? 는 데에는 약간의 스마트한 영상물이나 인터넷 등에 조금은 약은 물이 들진 않았을까.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자가용은 전무하면 TV마저 동네에 한 두대 있던 나의 어린 시절과 오버랩한다. 더 공감하는 것은 자전거에 있다. 내가 오 학년 때든가. 쌀포대를 고무로 뒷좌석에 감고 다 큰 어른이 타던 자전거가 있었다.
어찌 그 자전거로 자전거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내 또래는 날 과대평가한 것일까. 끝까지 잡아주고 싶지는 않았을까.
큰 키의 자전거에 제대로 앉지도 못했다. 다리 한쪽을 비스듬히 키워 페달을 밟았다. 갈 지자로 운전하던 내가 안정적이었을까.
속력이 붙자 또래는 뒤를 잡던 손을 놓아버린다.
절대로 손을 놓지 말라는 말을 반복하던 차에 또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당황한 나는 중심을 잃어버렸다. 나는 하늘을 날았다. 아주 잠깐. 그리고 다리 밑으로 꼬라졌다. 자전거가 내 다리를 치고서 나뒹굴었다. 일어나려 했지만 뻐근하다. 겨우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욱신거린다. 헉, 다리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뼈가 보이는 듯하다. 너무 놀라면 눈물도 숨을 멈춘다.
주인공처럼 보드랍던 그러나 아픈 것이 뭔지 어렴풋하게 뒤늦게 알게 되던 연둣빛이던 시절이 있었다. 동네에 흑백 TV 한 대가 들어왔다. 이른 저녁을 먹으면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집 대청마루에 올라갔다. 흑백이지만 브라운관을 뚫고 나오는 등장인물에 모두가 홀딱 빠져버렸다. 그 여운은 다음 날도 이어지기 일쑤여서 갑론을박하기도 한다.
어느 날이었던가. 온 동네 사람이 와서 귀찮았을까. 대문을 걸어 잠갔다는 동네 사람의 말에 모두 투덜대며 발길을 돌린 지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 마을에는 TV를 장만하는 집이 점점 늘어난다. 그러나 한 대였을 때보다는 덜 재미있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왜일까.
동심 뒤에는 살만큼 산 사람들의 애환이 드리워져 있다. 누군가는 그로 보호받고, 누군가는 그로 슬프고, 누군가는 그로 죽고 싶은 시절이 있었다. 참혹한 걸 겪거나 응어리를 껴안고 사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삶과 죽음은 늘 마주 보고 있다. 누구나 태어나면 죽는다는 것은 진리이다. 죽는 날이 정해지지 않았을 뿐. 죽음에 쫓겨 살면 사는 게 죽지 못해 사는 것일 테고,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최선을 다해 사는 이는 적어도 후회는 없기에 보람은 남지 않을까.
평생 쫓겨 다니다 빵 하나 천천히 음미하지 못하고 잠시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지 못한 삶은 어떤 삶일까. 무수히 남보다 많은 발자국을 찍었지만 소통하지 못하고 이름마저 알지 못하는 이웃.
과연 그는 바람인가. 물로 씻어내 자신의 끝마저 이웃이 알지 못하는 삶. 그는 과연 살았던 것일까. 이 세상에 존재했던 것일까.
막시밀리안 에른스트 에기디우스 좀머.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좀머가 독일어로 여름이라고 한다.
한여름 밤의 꿈이라면 깨고 싶다. 그의 도돌이표 악몽 같은 지팡이는 결국 묘비도 없는 그를 따라갔다.
좀머 씨로 인해 저렇게는 살지 말자. 뭐 하고 다니는 건지, 그 고집불통인 삶, 지나가는 개 같은 삶이라니. 작가는 뛰어난 감수성의 소년과 무감한 좀머 씨를 대조하여 삶을 투영한다.
그리고 선택은 오로지 독자에게 넘겨버린다.
아버지 자신도 의뭉스러운 말,
그러다 죽겠어요.
묘하게 거슬렸던 말, 그것은 작가의 일기예보였다.
자, 당신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요?
다가올 죽음 또는 지나간 악몽에 쫓겨만 다니면서 누가 다가와서 말이라도 걸면, 좀 내버려 두라고 할 건가요. 곁에 있는 사람과 눈맞춤하고 위로하고 때론 싸우기도 하면서 웃고 울다 갈 건가요.
따스한 햇살 아래서 소곤대는 아름다운 것들을 감상하고, 비 오는 날엔 장화 신고 빗속을 걸어보면 어떨까요.
그래도 외롭고 힘들다면 나 힘들다고 투정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요. 우는 아이에게 사탕 하나가 더 간답니다. 좀머 씨는 잠시도 쉬지 못하고 걷고 또 걸었어요. 그. 러. 나. 누구도 그의 흔적을 뒤쫓지 않아요. 우리의 가슴은 알고 있어요. 솔직한 나의 고동에 귀를 기울여 보아요. 괜찮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