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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후 Apr 29. 2024

모란, 시공간을 넘는

향이 현재를 뚫다

모란, 향을 묻다



가지 끝에서 엄마를 찾는 아이의 손바닥처럼 사방으로 돋아난 키가 크고 풍성한 잎사귀들이 사랑채 앞마당을 점유하고 있다. 황금으로 둘러싸인 눈동자는 자줏빛 눈망울로 마치 세기의 연인 엘리자베스를 연상시킨다. 부신 자수정 보석을 착용해도 더 화려한 이목구비가 은막을 뚫고 나와 관객의 숨을 앗아간 여배우이다. 애칭 ‘리즈’로 불렸던 그녀는 돌연변이 속눈썹을 타고났다. 흔히 ‘돌연변이’라 함은 부정적 어감을 주지만 그녀는 이를 비겨간다. 속눈썹이 두 겹인 그녀는 마스카라가 필요 없고, 귀하디 귀한 사파이어 같은 초록과 신비로운 보랏빛이 감도는 자수정 눈동자로 태어났다. 타고난 미모에 노력형 연기로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두 번이나 거머쥐었다.


사계절 꽃 중의 왕, 갑 오브 갑인 꽃은 장미가 아니다. 화려하고 위엄과 품위를 갖춘 리즈는 은막의 여왕이었다. 이집트의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그 화려한 명성은 그녀를 더욱 고귀하게 만들었다. 팝의 황제인 마이클 잭슨과도 친분이 두터웠던 그녀는 가히 모란에 비유할 수 있으리라. 모란은 고귀한 혈통을 인정받아 궁중에서 특히 총애받았다. 그래서 부귀화 또는 화중왕이라 부르기도 한다.


모란, 시공간을 넘다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여왕의 대표주자는 선덕여왕이다. 일연 스님이 만든 삼국유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모란이 처음 들어온 시기는 신라 진평왕 때라고 한다. 당 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빛깔의 모란을 그린 그림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또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나라 태종이 보낸 모란 그림을 유심히 본 선덕여왕은 이 꽃은 필시 향기가 없을 거라는 걸 예측했다고 한다. 여왕의 명을 받들어 씨를 땅에 심었더니 과연 자라 피어난 꽃에서는 향기가 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신하들은 선덕여왕의 혜안에 놀라워하며 어떻게 예측할 수 있었는지가 궁금하여 아뢰었다. 여왕은 그림 속에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 당 태종은 당시 신라의 선덕여왕을 조롱하려 한 것이나, 이를 알아챈 선덕여왕의 현명함을 길이 대대손손 전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꼴이었다. 당 태종은 지하에서 땅을 치며 배 아파하지 않을까.


모란, 시를 짓다


‘모란’ 하면 떠오르는 시구가 있다. 수험생이라면 동조할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1934년 문학 3호에 발표한 시이다. 모란은 절대적 가치를 지닌 상징적 존재이다. 모란이 지면 나도 무너져 내린다. 그러나 나는 다시 모란이 다시 피기를 기다린다. 그 찬란한 슬픔의 봄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시에 따르면 독립을 기다리는 마음과 비애를 그렸다고도 한다. 찬란한 슬픔이라니. 역설로 감정의 극대화를 보여주는 표현은 이때부터 시작이었으리라.


부귀영화와 아름다움을 대표하면서 미인을 일컫는 모란을 나는 수선화가 떠난 뒤안길에서 만났다. 수선화가 한창일 때 아름답다는 네티즌의 광고를 보고 혹시나 기대하며 찾은 예산의 추사 고택에서 후미진 영당을 찾았다. 한때는 찬란했을 수선화는 어디로 다들 떠나고 나를 반기는 것은, 반은 시든 한 송이와 그나마 멀쩡한 한 송이 둘이서 힘든 기색으로

“까꿍, 나 아직 안 죽었어. 내년에 꼭 다시 와. 날 보러 올 거지? 이 말하려고 여태 버텼다.”

모두가 내년을 향해 떨켜를 실행할 때 둘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나 보다. 아쉬운 석별의 정을 잠시 눈 맞춤으로 대신하고 사랑채에 들어섰을 때였다.


모란, 향을 뿜다


‘이 신비로운 향기는 무엇인고?’

나도 모르게 코 평수를 넓히며 코를 벌름거렸다. 어머나, 세상에나! 이렇게나 붉은 곤룡포라니. 화려함의 극치로구나. 가히 신라 금관을 착용한 여왕이로세. 선덕여왕의 화신인가. 아름답고도 존귀한 꽃의 자태에 그윽한 향에 취했다. 여기가 조선인가, 신라인가. 시공간이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듯한 사랑채에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모란, 향의 유무가 궁금했다. 우리 선덕여왕은 향이 있다. 혼인하지 않았으나 찬란한 신라의 문화를 꽃피운 여왕이 모란을 통해 봄이면 부활한다. 모란의 꽃봉오리는 한낱 개미를 유인하는 단물 수액을 생성하는 법이 없다. 자신만의 남다른 행보를 추구한다.


모란, 각성을 휘돌리다


함지박처럼 푸짐한 꽃은 나를 향해 함박 크게 웃는 여왕만 같다. 여왕이 위엄을 갖춘 말의 향기로 내 얼굴을 톡톡 두드린다.


‘어깨 펴, 기죽지 마!

‘네! 여왕님.

 고개 들고 당당하게 나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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