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우주도, 지구도, 동물도, 식물도, 우리 인간들도 다 하나님께서 창조 하셨다. 잊지 말자. 모든 시간 속에서 꼭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절대로 잊으면 된다. 이 사실을 희미하게 기억해서도 안된다. 마음 속에 아주 또렷하게 기억하자.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사실은 이 세상 모든 것의 전제이다. 나의 나 됨의 전제이고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의 대전제이다. 이 한 문장이 이 세상 모든 것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싶어했다. 세상은 과연 어떻게 창조 되었나?우리는 누구인가?인간은 과연 어떤 생명이기에 이 지구 상에서 유일하게 존재의 의미를 통찰하기 위해 이토록 애쓰는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물음을 일생동안 끌어 안고 이렇게 살아가는가? 때로는 마음을 끌이면서, 때로는 지독한 허무의 강을 건너면서, 때로는 한 밤중에 뜬 눈으로 시린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치면서, 누군가는 울면서, 누군가는 허탈하게 웃으면서 그렇게 질문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그러다가 그냥 질문하기를 잊었다. 아니 도망칠 수 없는 이 질문 안에서 애써 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공기와 같이 이 질문은 내 삶 전체를 덮고 있었다. 여기로 부터 회피하고자 정신없이 매달렸던 여러 가지 헛된 일들이 내 뜻과는 달리 틀어지게 되었을 때, 다시 허무함의 쓸쓸한 동굴 속으로 돌아와서 누워있는 내가 불쌍해질 무렵, 추운 어느날 단단하게 차려 입고 나갔다가 시나브로 스며드는 한기처럼 이 질문이 마음에 다시 스며든다. 나는 누구인가? 애초에 이 질문을 피해서는 살 수 없고,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다 무시하고 외면하면서 열심히 도망쳤다. 그러다 쓰러지면 비로소 내가 도망을 시작하였던 그 자리에서 여전히 달음박질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세상의 모든 인생이 그토록 궁금해했던 이 물음을 성경은 가장 첫 문장으로 답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내가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이 사실 앞에서 중요하지 않다. 이 사실은 이렇게 전 인류의 역사라는 유구한 세월을 거쳐 마치 거대한 기둥처럼 완강하게 서있다. 너무나도 뚜렸하다. 너무 강력하다. 대로에서 선거방송을 하는 화물차가 커다란 소리로 외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고, 천지를 울리는 천둥 소리도,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는 핵폭탄이 터지는 소리도 이 보다 더 크고, 깊게, 그리고 끈질기게 울릴 수는 없다. 모든 소리는 시작과 끝이라는 게 있게 마련인데 이 소리는 영원하다. 창세 이후로 시작된 소리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사그러지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휘감으며 증폭될 뿐이다. 내 미약한 손으로 귀를 틀어막아도 이 소리는 그것마저 뚫는다. 모든 소리처럼 공기나 유무형의 다른 매질을 통해서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에너지가 우주라는 공허한 공간을 거쳐 지구에 도달하듯이 확고한 언어로 내 마음 속으로 직접 들어 온다.
이제는 이 소리와 싸우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그래서 마지못해 받아드린다. 아!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니라.” 그 동안에 내가 헛발질 했던 시간들이 다 무너진다. 너무 아까워서 뒤돌아 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으니까. 조금 찌질해 보이지만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하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이렇게 인생의 대전제를 새롭게 놓고나면 모든게 바뀐다. 내가 생각해 왔던 모든 것이 바뀐다. 그래서 두렵다. 살아왔던 방식도 바뀌고 살아갈 방식도 바뀐다. 더 이상 학교에서 배웠던 가치관들, 수 많은 메스컴의 보도와 책 속에서 말했던 어느 현자들의 말들도 새로운 바탕 위에 다른 형상으로 지어져야한다. 세계관의 붕괴와 재건축이 두려워서 도망쳤는데 피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나머지 인생은 어떻게든 살아야하니까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다시 세워야한다. 답을 알았으면 달라져야하니까. 달라지지 않으면 또 다시 허무의 물살을 거슬러 헤엄쳐야 하니까 힘들다.
사실 그 동안 인정하면서도 어중간하게 살았는데 그것은 인정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면서 사는 것과 이 사실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한 채 살아가는 것 보다 적당히 알면서 살아가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이다. 세상과 말씀의 가운데에서 양쪽의 눈치를 살피면서 살면 더 지혜롭고 편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더 힘든 것 같다. 이제는 포기하자. 한 쪽만 바라보면서 살자. 어차피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한채 살 때에는 힘들었고,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에 반쯤 걸치고 살 때는 갈팡질팡 힘들었고,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면 그것도 힘든 일인텐데 그러면 그 중에 별로 안 해본 한 가지를 시도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런 나의 다짐이 다시 흔들릴까봐 늘 연약한 내 결심이 변할까봐 두려운 마음에 다시 말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나는 세입자 비슷하게 살았는데 정확히는 아들 같은 세입자였는데 이제는 아들처럼 살아보자. 한 20년 하나님에 대해서 외부인으로 살았고, 그 다음 20년을 세입자처럼 살았으니까, 나머지 인생은 아들처럼 살아보자. 힘들텐데... 많이 싸워야할텐데... 나는 겁쟁이인데... 두렵다.